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가슴께가 뜨겁고 심장이 빨리 뛴다. 서점이나 쇼핑몰에서 물건을 골라야 할 때처럼 장이 꼬이는 것 같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마음에서 너무 크게 잡음이 흘러나와 의미 없이 틀어두는 영상 소리들을 뒤덮는다. 소음에 지독히도 취약한 탓에 결국 화면은 까맣게 만들고 고요 속에서 타자를 두들긴다.
이직에 실패했다.
종결형으로 언급한 이유는 지금의 상태로 이 과정을 지속 아니 반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가고 싶은 직장은 없다. 이루고 싶은 꿈도 없고 승진에 대한 대단한 야망도 없다. 그러나 당장 망하지는 않을 것 같은 회사에서 적당히 많은 일에 치이며 인정도 연봉도 덜 받고 속 편하게 살기에는 자꾸만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명치께를 조여 온다. 엄마 아빠는 늙어가고 자꾸만 발목을 잡으러 기어 오는 가난을 걷어차내려면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키워야 한다. 관성처럼 더 좋은 곳을 가야 한다고 자꾸 우상향으로 바라볼 뿐이다.
주변에 일 잘하는 사람들만 둔 턱에 대부분 좋은 간판을 달고 있는 곳으로 터를 옮겼다. 그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또 얼마를 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한 오해로 그들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면접 때 대단한 열망을 꾸며낼 자신도 없으면서 그런 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 아니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폐인가 잠시 고민한다. 남들도 다 이런 거짓말을 하겠지, 하면서 면접에 임한다. 나름, 얼추, 서로의 니즈를 맞춰주는 것 같아 별 걱정 없던 곳에서 최종 면접에 탈락한 후에는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라밸이 개박살 난 것으로 유명한 그곳에서 나는 불철주야 일에 매달릴 자신도 없으며,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지도 않다. 구내식당과 사내 바리스타를 통해 얼마나 생활비를 줄여볼까 하고 설렜던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더 더 망할 거라는 헤드라인만 보이는 2023년. 자기 계발 도서로 가득했던 매대는 어느새 투자 관련 정보들이 가득 차다 못해 흘러 바닥으로 계단으로, 타고 타고 경주마처럼 시야를 차단한 나에게까지 도달한다. 괜한 의무감에 구독은 해두었지만 시드 머니는 커녕 신용 대출조차 완제하지 못해 쉽사리 눌러보지 못했던 채널의 영상 하나를 비 오는 토요일 오전, 무력감과 함께 보았다. 추천 도서를 알려주는 코너. 그 책에 따르면 돈을 버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라고 한다. 1) 내 시간을 팔기(급여노동자) 2) 내 시간을 조금 더 비싸게 팔기(유명인, 소규모 사업자) 3) 남의 시간을 팔기(기업가) 4) 투자자. 1,2에 집중하던 사람들은 결국 3,4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어지는 부동산 관련 투자 팁. 화자의 설명으로는 5년 간 워킹맘 투자자로서 자문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그와 그녀의 표정에서 부러움이나 혹하는 마음보다는 여전히 콘텐츠를 팔기 위한 상술은 아닐까 하고 화면을 덮을 뿐이었다.
2030이 급여 소득에서 기대를 포기하는 요즘 같은 때에도 삼전이나 카카오 주식도 한 자릿수 겨우 찔끔, 요동치는 그래프가 가져다줄 작은 돈의 손해가 무서워 얼른 털어버렸었다. 열아홉 살 때부터 어떤 계좌에 얼마가 있고 다음 달에는 얼마큼의 돈이 어디에 나가야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살림을 한다. 지난 계절 외투에 넣어두고 잊은 보너스 같은 만 원 한 장도 없는 일상은 구석에 있는 먼지 같은 포인트를 모아 커피 한 잔을 마시게 한다. 코인도 부동산도 이번 생에는 살 수 없는 버킨 백 같은 것이기에 탐도 관심도 내지 않았는데 자꾸만 이어지는 전세 사기 기사들에 눈알을 굴리게 되기 마련이다. 저게 본질이냐고, 다 허상일 뿐이라고 비웃던 동종업계 인플루언서들이 열정적으로 자랑하던 소득마저 잊혔던 기억에서 등장한다. '나도 어쩌면 할 수 있을까?' 하며 타이틀로 삼기 괜찮은 직장으로의 이직처럼 그럴듯한 껍데기만 만들어보자는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직장이 있는데 뭐가 속상하냐며 엄마를 달래던 나는, 영상 속 출연진들이 자식들에게 해주는 경제 교육이 조금 재밌었다. 우리 집에서는 돈을 좇는 것이 천박한 것이고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이 찰나의 삶이 아닌 영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만 배웠는데. 그렇게 말하던 엄마 아빠의 거처를 걱정하는 막내딸. 그 무엇도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만약 정말 희박한 확률로 엄마가 된다면 무엇을 알려주게 될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