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어 에반 핸슨>을 보고
1년 전에 썼던 글을 브런치로 옮기면서, 얼마 전에 봤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과 엮어 쓸까 잠깐 고민도 했었다. 결론적으로는 그럴 필요까진 없는 것 같아서 접었지만. 김연수의 유명한 표현을 대충 빌려 오면, 영원히 건너갈 수 없는 심연 너머 타인을 향한 두려움은 언제나 픽션의 소재로 인기 있는 듯하다(혹은 그것이 동서고금 창작자가 갖는 공포거나). 그만큼 우스워지기도 쉽다고 생각하고, 사실 두 영화 모두—특히 EOE는—그런 비판에서 비껴가기 어려울 것 같지만, 대신 좋은 점을 한 끗만 잘 살려도 관객과 공명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선 (왓챠피디아 별점은 3.5점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디어 에반 헨슨>이 어떻게 그 울림을 만들어 냈는지 다루고자 했다.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 미치도록 고픈 주제에 사람을 미치도록 두려워하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인데,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남자애 하나가 어느 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애가 내가 나한테 쓴 편지—친애하는 에반 핸슨에게로 시작하는—를 빼앗아 가서 그걸 옆에 두고 자살했다. 그 애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그 편지를 썼다고 확신하면서, 그런 편지를 받을 만큼 내가 죽은 아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제발 아들의 얘기를 해 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전부 착각이라고 해명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간절한 사람을 뿌리칠 만큼 용기 있지 못해서, 혹은 마침내 나에게도 청자가 생겼기 때문에.
<디어 에반 핸슨>의 앞부분을 성의 없이 요약하면 위와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뮤지컬 영화가 아니었다면 굳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시놉시스다. 플롯의 개연성이나 인물들의 흠결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만, 그래도 후기를 쓰겠다고 결심한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넘버들이 들을수록 마음을 파고들어서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맞닿을 수 있는가? 이는 태어날 때부터 떠안게 된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 집중해서 <디어 에반 핸슨>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영화의 맨 처음 주인공 에반이 부르는 넘버 <Waving Through Window>는 에반이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관객에게 단숨에 이해시킨다. 태양 아래 서면 화상을 입으니 몇 걸음 물러나고, 창밖으로 손 흔들면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래된 외로움과 두려움은 에반을 이미 좀먹었고 자신의 인생은 영영 이대로일 것만 같다.
특히 브릿지에서 반복되는 “When you're falling in a forest and there's nobody around/Do you ever really crash, or even make a sound?”는 그해 여름 에반이 깊은 숲속 나무 위에 기어올라간 뒤 추락했던 일을 가리키는데, 이 장면은 해당 넘버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변주되어 등장하며 하나의 상징을 이룬다. 바닥에 떨어진 채 고통스럽게 입을 뻐끔대는 에반과 누구도 그를 들여다보지 않는 고요한 숲은 그가 경험해 온 삶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숲이 에반의 거짓말 속에서 코너와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로 가공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코너의 부모가 자신의 아들에게 친구가 있었기를 바라는 만큼 에반도 숲속에서 홀로가 아니기를 소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은 언제고 창문 밖에 머무르며, 에반 자신은 감당 못할 거짓말을 덧칠해 죽은 남자애; 코너의 가족에게 간신히 들러붙어 있을 뿐이다. “Did I even make a sound/It's like I never made a sound/Will I ever make a sound?"로 이어지는 에반의 물음은 결국 자신을 날카롭게 헤집는 것이라 차라리 비명처럼 들린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일 <You will be found>의 제목은 그래서 흥미롭다. 내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누가 발견하냐면 우리; 나; 에반이 발견하는 것이다. 청자에 집중하면 이는 <The Anonymous Ones>에서 가리키듯 익명으로 각자의 고통을 견디던 우리들을 위로하는 곡이겠지만 화자에 집중하면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창밖의 누군가 돌아서서 자신을 찾아 주기를 기대하던 에반이 저가 당신을 찾겠다고 선언할 때 모종의 실마리는 탄생한다.
사실 에반이 이 노래를 부른 이유 또한 자신이 한 거짓말을 이어가기 위함이라 영화를 처음 보면서는 이 넘버도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넘버들을 듣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에반의 연설을 에반이 자신의 추락과 고독을 짓씹으면서 저와 같은 타인에게 손 내미는 장면으로 읽어 보면 곡이 영화의 주제의식에 기여하는 방식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다. 마침내 에반의 실토로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에도 에반이 코너를 제대로 ‘찾기로’ 결심함으로써 이 곡은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
찾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일 테다. 그런데 코너는 이미 죽었다. 에반은 코너를 영원히 알 수 없고 손에 남은 것은 고작해야 그가 쓴 노래 한 소절이다. 그것조차 에반이 생애의 한 순간을 몽땅 소모하고 나서야 간신히 알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골짜기가 있어 완전한 이해란 평생이 지나도 요원한 탓에,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남에도 그들은 나를 스쳐 지나가고 말 뿐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라 새삼 슬프거나 안타까울 것도 없다.
영화는 그래서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대단히 여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로지 그것밖에 없는 까닭이다. 세상에 흩어진 ‘나’들을 누군가 찾아줄 수 없다면 내가 찾아야 한다. 나의 슬픔과 외로움, 그것으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 결국 이를 가능케 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처절하게 홀로임을 느껴본 적 있기에, 에반이 상대 안의 슬픔을 더듬고 그에 손을 내밀어 보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매달렸기 때문에 에반은 원래라면 영영 알지 못했을 코너의 부스러기나마 붙잡게 되었다. 이 접촉은 하잘것없더라도 이전의 고립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삶과 혼자 맞서야 할지라도 타인 또한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고단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음을.
과거의 코너와 현재의 에반이 함께 부르는 넘버의 제목은 <A Little Closer>다. 부연할 필요 없이 가사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
I've been drifting, I've been dreaming
I would land upon the shore
To a haven, to a harbor
It felt so far before
Well, today, today
What felt so far away feels a little closer
(...)
창밖을 걷는 사람들 하나하나, 내가 가장 동경해 마지 않던 그 사람마저 사실은 슬픔과 괴로움을 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서로가 진 무게를 온전하게 알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있는 힘껏 외친다면 언젠가 메아리나마 응답해 올지도 모른다. 네게 손 내밀 때 머나먼 뭍은 한 치, 혹은 그보다 적게 가까워진다. 그것이 실제가 아니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우리는 비틀비틀 걸어갈 수 있으므로.
마침 뮤지컬이 한국에서도 곧 개봉하는데, A Little Closer가 뮤지컬엔 없는 넘버라고 해서 고민하는 중이다. 뮤지컬 보러 갈 돈이 하늘에서 내려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