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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Oct 15. 2021

'언어를 가진 사람'이 빚지고 있는 것

<먼지의 말>, 채효정

2019년 겨울, 고용노동청 **지청을 방문했다. 중형급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를 십 수명씩 두고도 상습적으로 계약서를 안 쓰고 요리조리 피하는 버릇이 있는 학원장을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만에 고용노동청 근로개선지도과에서 나를 맞닥뜨린 원장은 비꼬다가, 윽박지르다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정 모르는 초짜 강사도 아니고, 미국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디렉터와 영어로도 싸워본 일 있는 나다. 모국어로 싸우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원장은 내가 차분하게 앉아 조사관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클리어 파일에 고이 넣어 갖고 온 강의 시간표, 회의록, 출퇴근 기록을 하나 하나 꺼내 이야기하는 걸 보며 더욱 더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소리를 지를수록, 나는 차분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정돈된 언어로 된" "자기의 언어"를 가진 사람에 가까웠다. 

그 날 조사관은 나와 원장을 각각 따로 불러 조사를 하기도 했는데, 원장이 조사를 받는 시간에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대화를 듣게 됐다. 두 사람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남자는 어느 사업체의 대표, 여자는 그 사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인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는데, 침묵을 깬 건 남자 쪽이었다.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대강 이런 얘기였다.


"이만 하면 됐으니, 그만 합시다. 합의합시다."

"..."

"돈, 줄게. 그리고 좀 더 얹어줄게. 그러면 되잖아. 응?"

"..."


남자는 곧 일어나 자리를 떴고, 

남은 여자는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흐느꼈다. 


정확한 사연은 알 길이 없었지만, 대단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돈을 안 주고 있었던 것일 테고, 소송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둘이 합의를 보라는 조사관의 말에 남자는 마지못해 돈을 지불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을 테다. 무슨 일을 하는지, 남자가 안 주고 있는 돈이 월급인지 퇴직금인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걸 못 받고 속을 앓았을 게 뻔했다. 하필 그 순간 같은 공간에 있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여자에겐 미안했고, 남자에겐 화가 났다. 여자와 나는 경제적으론 비슷한 처지일지 모르지만, 나는 당연한 일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따지고 들 수 있는 "자기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자와 달랐다. 


여자도 자리를 뜨고 원장과의 합의를 위해 다시 들어선 대기실에서, 나는 확실히 원장보다 우위에 있었다. 역시 '소송을 할 게 아니라면 합의를 보라'는 조사관의 말을 듣고 대기실에 들어선 나는, "어차피 이 문제는 돈이 얽힌 문제가 아니고, 나는 당신이 앞으로 강사들을 채용할 때 꼬박꼬박 계약서를 쓰기를 약속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고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은 신고 자체를 없던 일로 해달라면서 꼬리를 내렸다. 조사관 앞에서 그렇게 이성을 잃고 소리를 꽥꽥 지르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잘못했다, 앞으로는 계약서를 잘 쓰겠다, 그러니 없던 일로 해 달라, 하고 조용조용 말하는 모습을 보며 참 볼썽사납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합의를 종용하는 남자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흐느끼던 여자를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매일 그저 그렇게 굴러가는 세상 같지만, 조금만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도 소리내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걸 알고 나면 내가 하루를 보내며 하게 되는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일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도 하루에 여러 명이 쓰러지고, 다치고, 죽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아직 학생인 앳된 사람도 있었다. 당진에서, 구의역에서, 태안에서, 여수에서, 전국 곳곳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나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절망스럽다. 우리가 아무리 나중에는 '먼지'가 될 존재라고는 하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껏 충만한 존재로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언제까지 타인의 고통에, 타인의 죽음에 기대어 나의 하루를 살 건가. '언어를 가진 사람'인 나는 이렇게 타인의 목숨에 매일을 빚지고 있는데, 나의 알량한 '관심'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어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진다.   

 

"백만 명이 죽이지 말라 외치면 죽일 수 없고, 천만 명이 살아있으라고 외치면 살아지게 된다"(p. 130)는데, 나는 그 외침에 얼마나 내 목소리를 보태었나, 되돌아본다. "아직은 죽지 않은 아이들의 부모"(p.125)이기도 한 나는, '언어를 가진 사람'인 나는, 지금보다 좀 더 크게, 세게, 외쳐야 한다. 더 이상은 죽이지 말라고, 더 이상은 죽이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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