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곡동 서작가 Oct 10. 2022

타인을 위한 밥상, 그 따스함에 대하여

<연대의 밥상>, 이종건


나는 밥 먹는 것에 그다지 진심인 사람은 아니다. 살면서 요리하는 일에 취미를 붙이지도 못했고, 맛집에서 맛있는 걸 먹겠다고 부지런을 떨거나 기다란 줄 끝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때 되면 먹어야 하는 밥, 어떻게든 먹으면 되는 사람에 가깝다. 반찬가게에서 반찬과 국을 사다 먹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고, 식당 음식을 포장해 와서 먹는 것도 괜찮다. 그만큼, 먹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내게도, 가끔 어떤 음식, 그 음식을 둘러싼 어떤 풍경들이 떠오르며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하는 때가 찾아온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그리고 추운 겨울이면 몇 년째 생각나는 음식들. 남편의 미역국, 그레이비를 끼얹은 따뜻한 비스켓과 매쉬드 포테이토, 펌킨 파이. 이렇게 세 가지다. 


2012년 12월, 나는 미국 중부의 인디애나라는 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동네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난 다음 날, 남편은 집에서 끓여온 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나를 먹였다. 참기름 냄새 진동하는 미역국에 햇반 하나를 말아 김치 얹어 밥을 먹었다.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부부에서 부모가, 그것도 그냥 부모가 아니라 고칠 수 없는 선천성 희소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흰밥과 미역국, 김치는 순간 순간 아득해지곤 하던 나를 말없이 안아주는 ‘소울 푸드’였다. 그 때 먹었던, 김치 양념이 배어 묘한 색깔이 나던 그 미역국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도 많은 미역국을 먹었지만, 그 때 그 맛이 똑같이 나는 미역국은 아직 만나본 일이 없다.      


그 해 12월, 갓 태어난 아이는 정밀검사를 위해 신생아집중치료실이 있는 대형 아동전문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머물며 초조하게 검사결과를 기다리던 그 겨울 밤, 잔뜩 긴장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준 건 뜻밖에도 미국 음식이었다. 우리가 머물던 아동전문병원에는 입원 중인 아이들의 보호자들을 위해 매일 저녁 그 동네의 시민단체나 자원활동 단체가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와 나누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먹었던 음식이 따뜻한 그레이비를 끼얹은 따끈한 비스켓과 매쉬드 포테이토였다. 그레이비는 고기 육즙에 밀가루를 넣고 볶아 만드는 소스이고, 비스켓은 한국에서도 KFC 매장에서 볼 수 있는 그 비스켓이며, 매쉬드 포테이토는 별 것 없는, 그냥 으깬 감자 요리다. 그레이비 소스는 한국에는 없는 형태의 소스라 완전히 생소하지만, 비스켓이나 매쉬드 포테이토에 끼얹어 먹으면 바삭한 빵이나 밋밋한 으깬 감자를 촉촉히 적셔주는 풍미 가득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음식을, 아이를 낳고 아동전문병원에 들어가 머물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그 밤, 그 음식을 맛본 뒤로 겨울 밤 따뜻하고 맛있는 게 먹고 싶어지면 어김없이 떠올리게 되었다. 나를, 우리 부부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그 낯선 미국 어느 동네에서 만난 평범하지만 따뜻한 음식은 갓 태어난 아이가 일찍 죽거나 다리를 잃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과 외로움에 어쩔 줄 몰랐던 그 날의 나에게 커다란 위로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 특별한 음식, 펌킨 파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할머니 두 분은 가을이면 꼭 당신들 교회에서, 이웃에서 나눠 받은 펌킨 파이를 한 조각이라도 남겨두었다가 우리 아이 몫으로 주시곤 했다. 분명 그 당시 아이는 그 펌킨 파이의 향과 식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2, 3년 전부터 갑자기 가을만 되면 펌킨 파이가 먹고 싶다며 졸라댄다. 아마 나에게 그레이비와 비스켓이 그러하듯, 아이에게 펌킨 파이는 할머니들의 애정과 관심, 위로였지 않았을까. 


책 <연대의 밥상: 한없이 기꺼운 참견에 대하여>를 읽으며, 위의 세 음식들, 그리고 그 음식을 처음 만난 순간들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어떤 음식들은 단순히 미각을 자극하는, 그저 한 끼 배 채우는 맛있는 음식을 넘어서서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일깨우게 한다. 서대문 형무소와 마주보고 있는, ‘옥바라지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길에서 활동했던, 여러 철거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투쟁을 함께 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연대의 밥상, 밥상의 연대에 대해 말한다. 


“연대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공허함에 웅크린 나를 욱여넣고, 그렇게 내 가슴에도 무언가 채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스며들어 서로의 살과 피가 되는 일이다. 서로 관계하는 일이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명백하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 선택한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 ‘밥상’이다. 우리는 밥상 앞에서 당신과 내가 고통과 기쁨, 배고픔을 느낄 줄 아는 보통의 몸뚱이임을 확인한다. 혼자서 차린 조용한 밥상도, 예기치 못한 때 누군가 차려준 고마운 밥상도, 여럿이 둘러 앉아 먹는 풍성한 밥상도,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먹었던 절박한 밥상도 결국 모두 ‘연대의 밥상’이다.”(108)


그 연대의 밥상은, 지금도 어딘가에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았던 미국 땅에서 나를 먹여 일으켜 세웠듯,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에서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먹여 일으키기 위해 뜨신 밥을 짓는다. 지난해 말, 국회의사당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문화제를 할 때 참가자들에게 따뜻한 차와 고구마를 나눠주던 밥차가 오랜 역사를 지닌 농성장 밥차라는 걸 알았을 때, 괜시리 숙연해지기도 했다. 나는 남이 해준 요리 덕에 다시 살 힘을 얻었으면서, 내가 남을 살리는 요리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어쩌면 그 부끄러움 덕분에, 요리에 조금 더 마음 붙여볼 의지가 생길는지도 모르겠다. 


책 속 아현동 잔치국수 얘기를 읽다가, 오랜만에 아이가 좋아하는 국수를 해 먹고 싶어 물을 올렸다. “국수는 엄마가 해 주는 게 제일 맛있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국수 말고도 다른 음식을 좀 더 할 줄 알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병이 망칠 수 없는 일상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