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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Oct 07. 2021

당신이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무지개를 타고>, 보배

어쩌다 보니 내 생일 무렵에 아이가 남편과 함께 큰 서점에 나갈 일이 있었더랬다. 평소에도 엄마 아빠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편지를 쓰건 뭔가를 만들건 해서 '선물'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인데, 이번엔 서점에 간 김에 엄마 생일 선물로 책을 골라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말에 되도록이면 책을 읽으려고 애쓰는 엄마가 제 눈에도 보였던 걸까. '엄마 주려고 샀다'며 포장까지 곱게 해서 내미는 걸 뜯었는데, 표지와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무지개의 상징을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인데, 어쩜 이렇게 내 취향에 꼭 맞는 책을 골라온 걸까. 



나는 지금 남편, 아이와 함께 살고 있고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이성애자'라고 규정짓진 않는다. 중고등학생 때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나는 종종 어떤 여성들에게 매력을 느끼곤 했다. 거꾸로 내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 친구들도 중고등학생 땐 종종 있었다. (그땐 웬 '내로남불' 심보인지, 내가 좋아하는 건 어쩌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게 특별한 감정을 내비치면 그게 그렇게 이상하고 싫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성을 사귀고 그 후로 쭉, 이성과 연애를 하면서 나의 '퀴어한' 기질은 크게 꺾였지만, 동성과의 교제나 사랑이 불가능하진 않으리라고, 심지어 한 번쯤은 그래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로 봐서, 나는 엄격한 이성애자는 아닌 것 같다. 


사실 내가 이런 나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 데는, 미국 생활 중에 만난 S의 영향도 크다. 어느 모임에서 같이 활동하는 사이로 만난 S는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보통의 미국인들과는 달리(?) 반응이나 감정 표현이 강하지 않고 늘 상대방의 말에 더 공감하며 잘 듣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여성인 C와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을 때, 나는 그 소식마저 차분하고 진중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알리는 그녀에게서 뭔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퀴어한 사람'은 굉장히 독특해서 당연히 눈에 띌거라고 생각했거나, 뭔가 불안정한 사람일거란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 스스로도 내가 퀴어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그런데 S와 C를 만난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태도랄까 마음이랄까, 그런 것이 크게 바뀐 것 같다.  


그래서일까. '퀴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내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를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그게 곧 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는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책, <우리는 무지개를 타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근대 문학은 물론이고 고전 문학 작품 중에서도 은근히 혹은 대놓고 퀴어문학임을 자처하는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로워서, 언급된 작품들을 하나씩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이성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이지만 소소하게나마 저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가끔 이성은 물론 동성과의 연애를 꿈꾸기도 하고, BL이나 알페스물을 찾아 읽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는 건 안 비밀!) 


이 책을 다 읽고 덮은 다음 날인 오늘. 

기다리던, 그래서 더욱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변희수, 그녀를 처음 영상 속에서 봤을 때,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날, 나는 스치듯 본 헤드라인 한 줄에 그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에게, 오늘의 이 소식을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또 한번 흐르는 눈물 앞에서 할 말을 잃은 나는, 그저 책에서 읽은 구절을 옮길 뿐이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모른다. 얼굴을 알더라도 목소리를 모른다.
혹은 얼굴과 목소리를 뺀 나머지를 모른다.
나에게 당신은 너무 많고 그래서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멋대로 이렇게 상상한다.
당신도 나처럼 자기 나름의 성실함과 약간의 절망과 예상치 못한 행복으로
하루를 채우면서, 그저 그렇지만 소중한 삶을 이어나갈 거라고.
그러하기를 기도할 때도 많다.
. . .
나는 당신에게 많은 말을 빚지고 있고
그것을 얼마간이라도 갚으면서 살고 싶다. 
지금 우리는 아주 조금,
닿아 있다.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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