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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니 Jul 28. 2020

잘 가 남편,

부부는 오늘도 헤어집니다.

잘 가 오빠, 운전 조심히 하고. 도착하면 연락해.





늘 그렇듯 월요일 새벽이면 비몽사몽 남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3년간의 장거리 커플을 끝내고 우리는 주말부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주말부부에게 시간은 남들과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월요일 아침이란 또 다른 한 주의 시작보다는 기다림의 시작의 의미가 크고, 금요일 저녁은 한 주의 끝보다는 기다림의 끝의 의미가 더 크다. 


누군가는 그러더라. 

주말부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이룰 수 있는 거래. 그래도 애틋해서 좋겠다. 연애하는 기분이겠네.


우리의 처지에 위로를 건네는 말임을 너무 잘 안다. 왜냐하면 신혼에게 주말부부란 그리 썩 행복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우리라고 결혼 후 1년이나 주말부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년에 한 번씩 있는 남편의 인사발령을 믿었고, 와이프도 주소지도 서울인 덕에 당연히 서울 발령이 날거라 믿었다.




인사 발표가 있던 날 우리는 김칫국을 한 사발, 아니 세 사발은 드링킹 했다. 


'이제 서울 발령 나면 근무지도 바뀌니까 이번 주에 셔츠 좀 사야겠어. 지하철은 2호선을 타고.. 음, 갈아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1시간 30분은 잡아야겠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8시쯤 되려나?'
'가끔 시간 맞을 때 같이 퇴근하고 오면 되겠다.'


지극히 현실적인 남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이번엔 정말 서울 발령이 나는가 보다.


너무 즐거운 상상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와 함께 설렐 순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설렘을 티 낼 순 없었다. 만에 하나 발령이 나지 않을 경우 나라도 남편의 실망감을 토닥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망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미안해할 남편이 싫었기 때문에.




인사 발표가 있던 날,


'여보세요?'

'응, 여보'

'발표 났어?'

'응.'

'.. 아니야?'


'응..'


무덤덤한척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설레지 말자고 머리로 자꾸 주문을 외워서인지 의외로 괜찮았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일까. 꽤 큰 실망감을 받은듯했다. 그리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데 왜 난 그게 더 슬펐던지.





분명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가 노력하면 웬만한 건 다 가질 수 있었다. 그게 능력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사람 마음도 원한다면 가질 수 있었다. 

설령 가지지 못했다면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온 지금은 너무도 다르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다. 분명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데 얻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면 이게 점점 어른의 생활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점점 나의 능력치만으로 내 세상을 꾸려나가는 데에 한계가 생기고, 

온실 속에 있던 새하얀 바탕의 도화지에 밑그림부터 그려가는 것이 아닌 

적당한 바람과 먼지가 스치며 흔적을 남긴 도화지, 윤곽이 스케치되어있는 그림에 예쁘게 나만의 색깔을 입히는 느낌이랄까?

Pinterest 형구 허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실선으로 스케치되어 있는 그림에 예쁘게 색깔을 입히는 것도 사실 꽤 흥미롭다.



구름을 그릴까 해를 그릴까 고민할 때, 구름 모양의 실선이 있다면 고민의 시간을 줄일 수 있고 그 구름과 어울리는 바다도 함께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름의 색깔은 거무튀튀한 먹구름이 아닌 파란 바다에 비친 새파란 색으로 색칠하는 것도 오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말부부라는 타이틀 아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

주변 친구들은 우리가 주말부부인 것을 알기에 주말에 우리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무언(無言)의 약속처럼 우리는 주말에 각자의 스케줄을 잡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긴다. 부지런히 피크닉을 다니고 저녁엔 맥주 한 잔과 함께 종알종알 수다를 떨며 한 주의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주말부부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이를 즐기고 못 즐기고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주말부부라는 밑그림이 그려졌으니 거기에 맞는 주변 경관을 꾸미고 예쁘게 색깔을 입히는 건 오롯이 남편과 나의 몫이다. 


이제는 초록색 창에 '주말부부 끝내는 법'이 아닌 '주말부부 즐기기'를 검색해야 할 때이다. 


못 먹는 감 찔러볼 시간에 눈앞에 있는 싱싱한 사과를 예쁘게 깎아 먹어야지.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아직 완벽히 그러진 못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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