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개봉에 즈음해 봉준호의 최고 걸작을 돌아봄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찬란하되 비루한 최종 '역광'에 관해
관광버스에 오른 도준 엄마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자기 허벅지에 망각의 침을 놓는다. 이어지는 침묵의 카운트다운. 5, 4, 3, 2, 1. 심장이 다시 뛰는 듯 외화면에서 사운드트랙이 둥둥 울리고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슬슬 다른 사람들과 뒤섞이는 그녀, 무리와 구분되지 않겠다 싶더니 역광을 받고는 이내 그들과 한 몸이 된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잃고 방황한다. 영화 <마더>(2009, 감독 봉준호)의 클로징 신(scene)이다.
이건 다른 유형의 종료 버튼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엔딩에서 자신의 최종 지위와 상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악을 응징했든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했든 비장한 최후를 맞았든 주인공이 '자아전시'를 잊는 일은 잘 없다. 봉준호의 전작 <살인의 추억>만 해도 박두만의 얼굴은 외화면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전시이자, 울분을 머금은 강렬한 신호 보내기였다.
반면 <마더>의 이 엄마는 마지막 모습을 홍보하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사라지는 중이다. 자기변호를 두 번 세 번 해도 모자랄 최종장에서 드러내는 숨바꼭질의 욕망. 엄마가 돼서, 왜?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마더>는 '국민엄마 김혜자'라는 기호가 '봉준호 월드' 안에서 어떤 변환들을 거치다 결국 '또 다른 김혜자'로 분화하는 구조의 영화라고. '김혜자_ver2.0'을 알려면 <마더> 속 '봉준호 월드'의 형질부터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우선, <마더>에는 충돌하는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봉준호 작품에 늘 등장해온 '부조리가 자연화된 사회구조'고, 다른 하나는 도준 엄마와 도준의 '어미-새끼 관계'다. 전작들이라면 ①후자(가족)를 잡아먹으려는 전자(구조)와 ②그 위압에 휘둘리지 않는 유체적 속성의 주인공들과 ③그 무덤덤함에 오히려 발가벗겨진, 구조의 후진성과 뻔뻔함이 두드러졌을 것이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예컨대 봉준호라는 이름을 최초로 알린 단편 <지리멸렬>에서는 사회 지도층 3인이 TV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의 치사함 때문에 곤란을 겪은 신문배달원은 TV 속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저 소음공해, TV는 꺼질 뿐이다. 토론은 토론으로 평가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 봉준호의 인물들은 이처럼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위선을 되레 잘 폭로하는 좌표를 종종 차지해왔다.
<마더>는 다르다. ①후자(가족)를 잡아먹으려는 전자(구조)는 나오지만, 도준 엄마가 그 부조리한 세계에 들러붙고 말았다. 봉준호가 '아들의 남자 구실'이라는 꿈을 가난한 엄마한테 미끼로 던졌는데 마더가 그걸 물어버린 형국. 즉 <가난 – 엄마의 아들 살해(미수) – 아들 지능 저하 – '바보' 소리에 센 남성으로서 대응 지시 – 아들의 '쌀떡녀' 아정 살해 – 엄마의 또 다른 살인>의 과정 안에서 엄마는 부조리의 일개 부품이 되고, 죄 없는 종팔에게 붙은 살인자 딱지에 눈을 질끈 감고 만다.
종으로 떨어진 자들이 횡으로 서로를 폐기하는 메커니즘.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고, 매서운 최종 응시를 보낼 '송강호의 눈' 같은 장치는 이 세계에 더는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죄들을 아들한테 들킨 엄마로서는 모든 게 발가벗겨진 꼴. 잊자. 내가 다 잊자. 망각을 위한 제의(祭儀). 관광버스에 오른 도준 엄마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자기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이어지는 침묵의 카운트다운. 5, 4, 3, 2, 1.
마더는 머더로써 임무를 완수했고, 종팔은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며, 비밀은 비밀이어야 한다. 이제 엄마라는 기표는, 김혜자는, 김혜자'들'은 헌신과 비정과 수치가 뭉뚱그려진 불순의 아이콘이 됐다. 역광을 받는 어둑한 윤곽 안으로 포개져 수렴되는 건 그들의 바람이다. 꼭꼭 숨겠다는 주술의 완성. 변형된 봉준호 월드에서,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들)은 이렇게 페이드아웃(fade-out)한다.
물론 주인공이 숨는다고 엔딩의 인상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단지 전시 대신 감춤의 제스처와, 그 바탕에 깔린 '존재의 현시를 멈추고픈 욕구' 및 연유가 도드라질 뿐이다. 더구나 <마더>에서 이 욕구는 인상주의적 마법에 올라탄 덕에 프레임 밖으로 뛰쳐나올 듯 강렬한 파장을 띤다.
그래서 도준 엄마의 퇴장 너머로 우리는 절규를 삼켜야 하는 몸들, 각각 '쌀떡녀'와 '그 새끼'로 호명되던 아정과 종팔의 쓸쓸한 비극성을 비로소 마주한다. 빛은, 엄마를 품은 역광은, 찬란하되 비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더>는 모든 피사체를 놓아버림으로써 마침내 세계의 입자를 포획한다. ⓒ eraze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