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글리 시스터>와 <투게더> - 신체 훼손으로 세계를 식별하기
※ 두 영화의 전개 및 결말이 드러납니다. :)
'신데렐라'는 우리가 머리털 나고 처음 만나는 유형의 교훈극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참고 또 참다 보면 선한 오컬트 같은 게 작동해 신분 상승 엔딩을 만날 수 있다는, '존버'의 원형 신화.
영화 <어글리 시스터>는 주인공 신데렐라를 집어 옆으로 치우고는 신화의 내부를 멋대로 헤집는다. 존버의 미학보다 재밌는 걸 찾겠다는 듯. 그러자 우선, 악의로 가득 찼던 계모와 의붓언니가 생존 전략 특화형 인물로 부각된다. 남근의 선택을 받아 먹고사는 게 목표인. 이를 위해 최고급 '규격'이 되고자 의붓언니 엘비라는 신체를 변형하고, 기생충에게 갉아먹음을 허하며, 급기야 고어 안으로 스스로 뛰어든다. 유리구두에 맞도록 발가락을 번갈아 재단해대는 모녀의 무지성 광기는, 그림 형제가 봤어도 흡족했을 레벨의 그로테스크다.
큰딸 왕비 만들기 프로젝트가 무산되자 엄마는 직접 선수로 뛴다. 한창 플레이(!) 중인 엄마와 만신창이가 된 언니 엘비라를 데리고 집을 벗어나려는 막내딸이 서로 눈을 마주치는 엔딩부 숏은, 여러모로 기가 막힌다. 안주와 탈주라는 교차되는 역학 구도를 수치와 후안무치, 서글픔과 '눈먼 짐승'으로의 진입 등 상반된 정서들이 휘감으며 희비극의 어나더 레벨이 되는 것.
물론 시대의 규격 안에 몸을 구겨 넣는 자들보다 끔찍한 건 규격의 소유자들이다. 영화에서는 무려! 신데렐라를 포함한 남녀의 신체 부위가 거리낌 없이 프레임을 들락거리며 심지어 정액도 뿌려진다. 이때 규격의 주인들에게 중헌 것이 관계의 맥락이 아닌 클로즈업된 쾌락임을 상기하자. 뻔뻔하고 민망한 숏들마저 타당한 돌발처럼 느껴지는 건, 본능을 휘장인 양 두르고 과시하는 것이 계급의 특권인 이곳 세계의 특수성 탓이다.
<어글리 시스터>는 이렇듯 선한 기표로서의 신데렐라 신화를 다른 경로로 탐험하고 해부하며 부조리를 폭로한다. 시대의 아이콘 '백마 탄 왕자'는 구세주가 아니라 불쾌한 족쇄에 다름없으며, 궁궐은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던전 같다. 인지도 최강의 교훈극이었던 만큼 거기서 추출된 이 감각들도 시공간 초월적이다. <어글리 시스터>는 영화 속 그때와 영화 밖 지금을 모두 불쾌의 장으로 만드는 데 기어이 성공하며, 호러-블랙 코미디 장르의 최전선에 우뚝 서게 됐다.
'신체 강탈자'는 공포영화계의 든든한 맏형 콘셉트로, 특히 미국산 바디호러의 레전드 계보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숨은 불온한 공산주의자거나('신체 강탈자의 침입' 시리즈), 개척지 내 미지의 침입종이며(괴물), '1+1=0'을 만드는 괴물 유전자이기도이기도 하다(더 플라이). 최근에는 내 분노와 우울을 잡아먹고 크는 자기 파괴적인 또 다른 나(서브스턴스)가 되는 등 침입자들은 다양한 콘텍스트와 호흡하며 주인공의 심신을 점유해대는 실질적 공포로 작동해왔다.
영화 <투게더>의 특이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신체 강탈자 포맷을 쥐고 와서 짐짓 무서운 척, 하더니 어느 지점부턴가 카메라 핸들을 다른 방향으로 획 돌려버린다. 공포라는 기본 가지에 만약 강탈자가 내 연인이라면? 1+1이 0이 아닌 1이 될 수 있다면? 같은 변주를 접붙여 끝까지 가꿔버리는 것. 청출어람을 위한 뻔뻔함, 뚝심이라고 해두자.
그러면서 진화의 역방향, 즉 분화를 거스르는 퇴행 권유자를 등장시키는데, 이런 유의 가스라이팅 빌런은 대개 스크린 안팎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투게더>는 그를 오히려 개척자 포지션으로 둔갑시켜버린다. 도망칠 수 없다면, 죽든지 받아들이든지.
그렇게 주인공 커플한테 접붙임의 결과는 1+1=1의 물리적 완성, 섹스의 최종 버전으로서의 '상시 결합체'가 됐다. 진화의 순서로 볼 때 완전한 역행이지만 역시 퇴행을 택하는 예컨대 <미드소마>나 <셔터 아일랜드>처럼 서글프지 않으며 되레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하다. 말로만 하나가 되지 말고 진짜로 그래 보면 어떻겠냐는, 사랑에 관한 가벼운 듯 섬뜩한 농담을 감독인 마이클 생크스는 호러와 로맨스와 코미디를 모조리 합쳐(togather), 영화적 상상의 극한으로 밀고 나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질문. 당신네도 이들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꿀꺽, 이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자체로, <투게더>는 올해의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신선한 시도' 같은 평범한 수식어는 고이 접어둬야 마땅할 만큼, 두 작품의 뻔뻔함은 두세 단계는 더 높은 장르적 경험을 선사한다.
<어글리 시스터>의 셀프 신체 훼손과 셀프 섹스-기계화는 사적(史的) 문서인 동시에 무저항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개인들의 사적(私的) 비루함이기도 하다. 영화는 비판의 화살을 전방위적으로 날림으로써 '남 탓'과 '감정에의 호소'를 동력으로 삼는 여느 페미니즘 표방 무비들을 아득히 넘는다. 감독인 에밀리 블리치펠트는 무려 데뷔작에서 이걸 해냈다.
<투게더>는 '신체 강탈자'와 '평생의 연인'이라는 양면적인 것들을 돌려세워 마주 보게 하고는 어색하거나 말거나 기어코 붙여버린다. '평생 함께'를 물리적으로 변환하기. 보다 보니 그럴싸한 것 같아 정신줄을 붙든다. 몸의 붕괴를 어디까지 허할 수 있을까, 끈적거리는 상상의 순간 호러와 코미디는 융합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놀랍게도, 역시 데뷔작. ⓒ erazerh
"나는 내 몸 앞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 몸 자체다.“
- 모리스 메를로 퐁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