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17년 11월 22일) 이국종 교수는 북한 병사의 수술 후 경과에 대해 생중계 브리핑을 했다. 사실 말이 'case 브리핑'이지 호소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상태에 대한 내용은 보도자료로 프린트해 기자들에게 전달됐다. 이국종 교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환자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들은 가리켰다.
"말이 말을 만들어내는 말의 잔치 속에서 저희 병원, 저희 과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며칠간 논란을 접하며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직업적 사명감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골몰해 온 이국종 교수. 기자가 환자 상태를 물었기에 '기생충' 이야기로 답변하니 환자의 인격을 모독한 죄인이 되었다.
말의 힘은 무섭다. 정당한 일을 해도 죄인으로 포장될 수 있는 사회다.
장면 둘.
"남한 노래 듣고 싶다." 네 발의 총알을 맞고 의식을 잃었던 그가 눈을 뜨자마자 입 밖으로 꺼낸 첫마디였다.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귀순한 북한 병사는 무슨 꿈을 꾸고 이 땅에 왔을까.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과 행복 따위의 것일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이십 대 북한 병사의 꿈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일지도. 기대와 희망을 안고, 죽을 각오로 남한 땅에 온 북한 병사가 이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그때도 그는 '오길 잘했다' 말할 수 있으려나.
장면 셋.
'사회'라는 말. '구조'와 'system'이라는 말이 그 크기만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 어떤 글을 보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힘들 때 '구조'가 문제라며 '구조'만 고치면 뭐든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구조를 고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도 없이 말이다.
구조라는 말이 무겁게 와 닿을 때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을 건드릴 때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만 이야기하기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정치, 언론, 시민사회, 경제, 재계, 말단 노동자까지 모든 분야, 모든 구성원이 제 역할에 충실하고 사회의 건강한 톱니바퀴 중 하나로 제 기능을 다해야만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 말이 피부에 와 닿는 강도가 다르다.
이국종 교수가 오늘 브리핑에서 기자(언론)들에게, 정치권에 응급의료 시스템 개선을 호소한 것이 공감이 됐던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을 말단 노동자로 칭하며, 정치권에서 만들어 놓은 정책의 아래에서 수단으로써 도구로서만 작용한다고 그는 말했다. 법과 정책이 그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구조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때문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내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사회를 구성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로서 그가 해야 하는 몫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