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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Feb 11. 2022

가끔 바쁜 악마의 일기

추락하는 별에서 10화

악마의 침실에는 두 뼘짜리 가로 서랍이 달린 청동 책상이 있다. 서랍 속에는 찔레나무로 만든 연필이 세 자루

들어 있고 서랍 손잡  모양이어서 간혹 찔리는 일도 있었지만 장식미가 빼어나 불편함을 감수할 만했다. 다리는 염소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만든 것으로 특히 무릎과 발굽의 디테일이 훌륭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악마가 아끼는 것은  채로 졸고 있는 아기 염소 모양의 서진이었다. 처음 이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없었다.  옆에는 언제나 놓여 있는 황금으로 만든 일기장이 있다.  삶의 보람을 찾고자 악마가 아는 최고의 기능공에게 부탁해 만든 종이까지 황금으로 만들어진 일기장이었다. 하지만 자주 쓰지는 않았다. 펜이 서랍 속에 있고 특별히  일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악마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데 그럼 악마는 장식 건축의 그늘에 집을 짓고 살고 있을까 아니면 두껍게 쌓아 올린 유화의 잔금 아래에서 굴을 파고 있을까? 어찌 되었든 이 세계가 아닌 곳에서 악마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아마도 악마는 우리와 가까이 그것도 아주 가까워 소매를 스칠 정도의 거리에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마를 볼 일이 없다. 악마는 범죄자의 귓가에 속삭인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범죄자가 혼자 그 소리를 들었다 할 뿐이라 그게 정말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것인지 본인이 괜히 남을 해코지할 생각에 사고를 치고 악마를 사칭하여 핑계를 대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구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개인의 악행에 하나하나에 악마가 간섭한다는 것도 너무 그릇이 작고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악마는 딱히 별 일을 하지 않으며 긴 삶을 살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논으로 들로 회사로 향하는 인간의 근거리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렇다고 악마의 삶이 무한정 무료한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 지루한 수천 년의 삶 속에서 겨우 두 번 쓴 그 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날도 평소처럼 잠에서 깨 세수를 하려던 악마는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백 마리의 동물 가죽을 엮어 만든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이불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줄기 빛이 날아드는 것 아닌가. 악마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기보다 습관적으로 회피하려 들었다. 혹시 이불이 들춰진 곳이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뒤집어써보았다. 하지만 빛은 여전히 비추었고 악마는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날아온 빛은 꼭꼭 여맨 바느질 구멍부터 북극곰 가죽까지 뚫고 들어와 이불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불에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안 악마는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대체 누가 자신의 집까지 어수 선하게 만드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차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빛을 따라가는 것이니 가는 길이 험난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악마는 보리수 아래에서 그 빛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인도의 여느 수행자처럼 다릴 꼬고 앉아 있었지만 몰입의 정도가 사뭇 달랐다. 그는 악마가 지척에 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깨달음이 불러온 빛이 우리 집까지 올만하지.'


하지만 잠을 방해한 상대에게 마냥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없었던 악마는 승자도 패자가 없을 판에 괜한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몰입을 흐트러트리고 싶었다.


"그래 세상에 애욕 없는 인간이 없을 리가 있나?"


악마는 먼저 미녀를 데려다 참선을 하는 그의 앞에 두고 애욕을 일으켜 보았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먼저 당근으로 회유를 했으니 다음은 당연히 채찍의 차례다. 악마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수천의 군단과 생전 보기 힘든 기괴한 것들을 불러 모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주 정확할 것이다. 반 쯤 좌절하고 반 쯤 속이 상한 악마는 도발을 멈추기로 했다.


'그래 늘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악마는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와 첫 일기를 쓴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때로는 도망치는 게 좋다.>


그럼 두 번째 쪽은 뭐라고 적혀 있을까.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첫 줄만 살짝 보자.


<광야를 걷던 날이었다. 아주 힘없고 배고파 보이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영혼만큼은 빛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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