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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방학 Mar 25. 2024

아내는 왜 나에게 턱받이가 어딨냐고 물을까

아내와 나는 종종 싸운다. 신혼때는 '자주'였는데 지금은 '종종'에 가깝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 있어서 대격돌,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한 판 붙는 느낌이다. 발단이 되는 일도 대수롭지 않다. 예를 들어,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나에게 물었다.

"여보, 둘째 턱받이 어딨어?"


이 질문을 들은 나는 슬며시 화가 났다. 아니, 분노조절장애냐고? 아니다. 들어봐라. 우선, 둘째는 이제 갓 11개월된 우리 아들이다. 나는 번역가라는 이유로 둘째 육아도 도맡아하고 있다. 번역가는 어차피 아무때나 일해도 되잖아, 라는 게 세간의 편견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일을 안해도 저절로 번역이 착 되어 있고 그런 건 아니다. 프리랜서의 시간은 프리라고 생각들 하는 것같다. 


아무튼 그래서 아내는 둘째 담당인 나에게 둘째 턱받이 위치를 물었다. 하지만 둘째 턱받이는 둘째 옷을 담아놓은 카트(발이 달려서 왔다갔다 할 수 있다)에 여러 개가 있다. 아내도 카트의 위치는 안다. 그렇다는 얘기는 뭔가 특별한 다른 턱받이를 말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그게 뭔지 전혀 아무 감도 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무슨 턱받이?" 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묻는다고 물었지만 아마도 슬며시 난 짜증 '도대체 무슨 턱받이를 말하는 거야? 설명부터 해줘야지?'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을 듯하다.


"여기 내가 의자에 걸어놓은 턱받이 여보가 치웠을 거 아냐."


첫째, 나는 턱받이를 치우지 않았다. 아내가 둔 물건을 멋대로 치운 다음 호되게 혼난 적이 여러번 있어서 나는 그 다음부터 아내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둘째, 물건이 없어지면 왜 그게 다 내 소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들로 나는 아내에게 '잘 모르겠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가 화를 냈다. 


"여보가 치웠을 거 아냐? 어디다 둔거야? 어린이집 가져가야 하는데."


"무슨 턱받이? 난 모른다니까?"


그렇게 해서 둘째를 어린이집으로 데려가기 직전까지 우리는 말다툼을 했다. 답이 없는 싸움이었다. 경찰은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단정하고 (물증도 없으면서) 용의자는 가만히 있다가 단지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붙잡혀온 꼴이다. 결국 턱받이는 찾지 못했다. 말다툼을 하면서도 온 집안을 뒤져보았지만 깜쪽같이 사라졌다. 아내는 뿔이 났고 나도 화가 났다.


대략 이런 식의 싸움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한다. 그래도 오늘 정도는 양호한 편이라 서로 미안했다며 사과도 하고 화해했다. 


마음이 좀 진정되고 나면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무의미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다툼을 계속 할까. 말투의 문제일까. 성격, 아니면 가치관? 하지만 깊이 팔 수록 답을 알 수가 없다. 아마 저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문제가 아닐까 추측은 하는데,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서로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 상태, 그리고 외부적 환경의 조합이 맞아떨어지면 여지없이 불꽃이 튄다. 마치 특정한 기상 조건이 충족하면 우박이 내리고 번개가 치는 것과 같다.


결혼 생활이 길어지면서 우박과 번개가 내리치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피할 수  없다. 여름이 오면 장마가 지고 겨울이 오면 한파가 오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혹은 이사를 간다손쳐도 피할 수 없다. 요령을 부리는 수밖에 없다.


여름이면 장마를 대비해 큰 우산을 챙기고 겨울이면 추위를 막아줄 패딩을 껴입는다.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게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이다. 화가 나도 심한 말은 절대 하지 않고, 속상할 때는 솔직하게 마음을 말하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저 사람도 나랑 사느라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내가 힘든 만큼 딱 그만큼 저 사람도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나는 힘든데 쟤는 왜 저렇게 편해보이지 라고 생각하면 괴롭다. 억울하다. 어쩌면 저 사람도 나만큼 고통스러워 봐야 해 라고 복수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살아보니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다. 턱받이 위치를 몰라서 황당한 나만큼, 상대는 턱받이가 사라져서 당황한다. 자기가 안 치웠으니 치울 사람이라고는 같이 사는 사람 한 명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잡아떼니' 속이 터질 수밖에. 차분한 마음으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상대 마음이 너무나 쉽게 이해된다. 문제는 바로 그 상황에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지만.


저 질문의 답을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냥 물어볼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둘째 턱받이가 사라진 걸 둘째에게 물어보거나 동네 친구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같이 사는 어른 인간이라고는 나 하난데, 나에게 물어보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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