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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독립언론이 왜 자꾸 평범한 경제 매체로 바뀔까

레디앙, 직썰, 블로터가 모두 경제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by 챠크렐

얼마 전 미디어오늘의 기사 ''독립 진보 언론'은 가능한가…20년의 물음'이라는 기사를 뒤늦게 접했다. 기사를 읽고 진보 매체인 '레디앙'의 명맥이 사실상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간 써 왔던 노동·인권 등의 기사가 아닌 기업의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쓴 기사가 메인 페이지에 배치돼 있다. 최근 기사들을 쭉 살펴봤다. 대부분이 기업 혹은 정부·지자체 보도자료 기반 기사였고 자체 취재 기사는 전무하다시피했다. 여러 기자들의 이름이 있었지만 모두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사실상 '레디앙'이라는 이름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끊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레디앙의 편집장과 레디앙을 10년 정도 다닌 기자가 지난해 그만둔다는 페이스북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후 한동안 정지 상태로 있다가,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매체의 성격이 바뀐 것 같았다. 일단 명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경제·산업 등 이것저것 다 다루는 식으로...


새롭게 바뀐 '레디앙'의 10월 16일 저녁 메인페이지. 진보 언론이라는 정체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쉬움이 컸다. 대학생 때 학교 교지와 청년 독립언론 활동을 하며 여러 독립·대안매체에 관심을 가졌고 그 중 하나가 레디앙이었다. 노동·인권 등과 관련해 이곳에서 쓴 기사를 종종 봤었다. 당시에도 레디앙은 사실상 후원금에 대부분의 재정을 기대고 있어 경영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에도 10여 년간이나 활동을 이어간 게 아닌가. 어려움 속에서 자기 색깔을 유지하느라 그동안 구성원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싶었고,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참 많은 고민을 거듭했을 것 같았다.


또 현재의 언론 환경에서 명확한 콘셉트를 가지고 독립적인 언론사를 운영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론사도 회사라 매출이 발생해야 지속 가능한데, 기사와 후원만으로 계속 매출을 낸다는 게 어렵다. 게다가 요즘은 워낙 기사 외에도 콘텐츠가 많아 유튜브나 블로그, SNS 등으로 웬만한 것은 대체할 수 있다.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공들여 쓴 좋은 글도 그냥 묻히는 실정이고, 이러다 보니 유료는커녕 무료 구독자를 끌어오기도 쉽지 않다. 설사 어떤 한두명의 힘으로 어렵사리 매체 운영을 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이를 포기한다면? 그러면 진짜로 운영이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특정한 분야를 중심으로 매체를 지속 운영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기사까지 스스로 찾아 읽을 정도로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여기서 후원이나 유료구독까지 하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은 더 줄어든다. 설령 아무리 기사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입소문을 많이 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매체가 운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했을 때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의 방식을 택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해산(폐간)이다. 운영에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조직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한때 페미니즘·진보 성향의 뉴미디어 독립언론으로 유명했던 '닷페이스'가 대표적인 사례고, 최근에는 뉴미디어 플랫폼인 '얼룩소(Alookso)'가 운영을 접었다. 둘 다 재정 문제가 문을 닫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닷페이스'의 메인 페이지. 홈페이지 자체는 살아 있지만, 콘텐츠 업데이트는 2022년에서 멈췄다.


두 번째는 온라인 경제지로의 변신이다. 그간의 활동으로 알려진 언론사 이름은 유지하되, 특색 있는 콘텐츠 생산을 포기하고 기업의 보도자료 등 기업 관련 기사를 중점적으로 쓰는 거다. 기존에는 기사 하나하나를 쓰는 데 많은 품을 들여야 했지만 이 경우 보도자료나 기존에 나온 기사들을 참고하면 되기 때문에 기사 생산이 매우 쉽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기업과의 접점이 어찌어찌 만들어지기 때문에, 소액이라도 광고나 협찬 명목의 돈을 요구할 명분도 생긴다. 아무리 작은 언론사라도 기업 입장에서 이러한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마냥 쉽지 않다. 그렇게 소액이라도 광고비를 받게 되면 예전의 유명세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늘고 길게 연명할 수는 있다. 레디앙은 이 같은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 2~3년 전 이와 같은 길을 간 또 다른 독립매체가 있었다. '직썰'이다. 직썰은 2014년 팟빵을 통해 정치·사회 관련 방송을 내보냈고 같은 해 인터넷 매체 운영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기성 언론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거침없이 정치 관련 현안에 대해 얘기하는 대안 매체 성격이 짙었다. '나는 꼼수다'만큼 파장이 크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잘 알려진 매체였고 '직썰'이라는 표현도 이후 일반명사화됐다.


그러나 2022년 직썰은 '제2의 창간'을 선언하며 기존의 정치·사회 대신 경제·산업 기사를 대폭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직썰을 창간한 정주식 대표도 물러나고 새로운 인물들이 자리를 꿰찼다. 기업 보도자료 기사 비중이 대폭 늘어났고 간혹 기업(주로 오너 일가)에 대한 비판기사도 게재됐다. 자연스럽게 정치·사회 관련 기사의 비중은 확 줄었다. 기사 내용만 보면 사실상 흔한 인터넷 경제매체와 다를 바 없다. 지난해에는 10주년 기념 포럼 주제를 'AI시대 혁신 전략'으로 잡았는데 경제매체들이 우후죽순으로 개최하는 포럼과 흡사한 주제다.


'직썰'의 10월 16일 저녁 메인페이지. 전형적인 온라인 경제지의 기사 구성이다.


사례 하나 더. IT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콘텐츠 시도를 했던 매체인 '블로터'다. 한 10년 전만 해도 블로터는 IT 뉴스를 토대로 뉴미디어로서 각종 시도를 많이 했던 매체 중의 하나였다. 각종 데이터를 활용한 심층 기사를 쓰기도 했고, 일반적인 리뷰 기사보다 훨씬 말랑말랑한 리뷰 기사도 다뤘다. 기자뿐만 아니라 테크 쪽과 관련해서 글 좀 쓰는 분들의 다채로운 콘텐츠들도 실렸다. 이러한 경험을 발판으로 기자를 준비하는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넥스트 저널리즘 스쿨'이라는 교육 과정도 운영했다. 기존 미디어 환경을 넘어 새로운 미디어를 구현하는 방법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관련한 실습을 할 기회도 제공했다.


그러다가 2020년 즈음 급격하게 색깔이 변했다. 경제·투자 등의 기사를 주로 쓰는 IB매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국내 최대 IB매체 '더벨'에서 퇴사한 기자들이 블로터에 유입되면서 노선 변경이 본격화됐다. 대표 등 경영진들이 바뀌었고, 기존 인력들은 순차적으로 퇴사하고 경제매체 경력 중심의 기자들이 새롭게 입사해 IB 매체로 옷을 갈아입었다. 기업들의 보도자료와 사업보고서 중심의 분석 기사, 그리고 기업들을 비판하는 기사 등 기업 관련 기사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분야도 IT를 넘어 산업·금융 전반으로 확대됐다. 매체 성격은 IT 뉴미디어에서 '더벨'과 같은 IB매체로 급변했다. 이제는 이 매체가 뉴미디어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블로터에서 진행했던 '넥스트 저널리즘 스쿨'은 지난 2018년 이후 명맥이 끊겼다. 그 이후 회사의 전반적인 상황이 급변했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ㅍㅍㅅㅅ(ppss)'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을 만든 이승환씨가 워낙 맛깔나게 드립을 치며 각종 이슈와 어렵고 딱딱한 얘기들을 재밌게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글 좀 쓰는 다른 필진들도 이곳에서 이런저런 재미난 콘텐츠를 많이 선보였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기사나 인터뷰 형태를 빌리는 광고성 콘텐츠의 비중이 크게 높아져 예전 같지 않긴 했다. 부대사업으로 기업 홍보 대행 서비스('평판상승'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됐었다)도 하게 되면서 이들이 홍보하는 기업에 대한 콘텐츠도 더러 올라왔다. 콘텐츠만으로는 매출을 내기 어렵다 보니 나름대로 수익 다각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지난 8월 이승환씨가 경영권을 넘기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존에는 없던 '기자'들이 기사 형태의 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보도자료·이슈 관련 기사량이 늘어났다. 제호도 'ㅍㅍㅅㅅ'에서 'PPSS(People&issue)'로 바뀌었는데 뭔가 좀 더 기존 언론사스러워진 느낌이다. 그래도 이전부터 기고한 외부 필진들의 글도 꾸준히 올라오는 것을 보면 아직 과도기적인 시기로 보이는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를 좀 봐야 할 것 같다.


한때 'ㅍㅍㅅㅅ'라는 로고가 인상적이었지만, 지금은 'PPSS'로 제호를 바꿨다.




한때 나는 모 IT매체에 몸담았었다. 어느 날부터 이곳은 자신들을 'IT에 강한 경제매체'라고 재정의했다. 그러면서 IT와 거리가 먼 조선·철강·석유화학·부동산 등의 분야로도 취재 영역을 확장했다. 포털사이트에서 매체 성격을 분류하는 카테고리도 'IT'에서 일반 '인터넷매체'로 바꿨다. 제2의 도약을 위한 전진이라고 포장됐지만 실상 더 많은 기업들과의 접점을 만들어 광고 매출을 확대하려는 목적이 컸다. 정확한 숫자를 본 것은 아니지만 실제 매출 규모는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IT매체로서의 색채는 확실히 약해졌고, 인적 구성 역시 IT를 잘 아는 기자보다는 다른 경제지나 온라인 매체 경력이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도 이 언론사가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고 아쉬워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들이 생존을 위해 인터넷 경제지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남일 같지가 않다. 기자였던 시절 내내 그러한 씁쓸함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다. 더욱이 지금도 AI 기반 콘텐츠를 통해 매출을 내려고 시도하는 입장에서, 콘텐츠만으로 독자들의 지갑을 열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계속 실감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예전처럼 신문을 많이들 돈 주고 구독하거나 사서 보는 시대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결국 가장 쉬운 길은 취재와 기사 작성을 발판삼아 돈을 가지고 있는 곳에 손을 벌리는 것이다. 가령 기업, 정부부처, 공공기관 등에 말이다.


한국에서 색깔이 뚜렷하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여러 시도들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을 찾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간 많았다. 하지만 아직 그 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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