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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이응이응 Jul 05. 2024

쿠팡 알바 100일 적응기 - 10

길을 잃어도 괜찮을 권리


쿠팡과 어울리지 않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쿠팡에서는 길을 잃어도 괜찮다.


어떤 길이나 공간에 다 가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쿠팡은 처음 온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쿠팡 물류센터는 독특한 공간이다.


일단 가서 겪어보지 않고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도 믿기가 어려운 그런 곳.


말도 안 되게 넓고 높은 공간에 온갖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선반의 행렬은

끝이 어딘지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경악스럽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곳에서 길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 누구에게든 수월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물류센터의 사람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아주 잘 알아본다.


아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발걸음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는 길을 잃었다고

강력히 표현하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에게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를 묻고

알려주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길을 잃었는데 아무도 나서서 알려주지 않는다면 누구나 붙잡고 물어보면 된다.


쿠팡에는 길을 물어보는 척 믿음 강요에 나서는 사람은 없으니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기꺼이 친절하게 가야 할 곳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처럼 쿠팡에서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기본으로 장착해야 할 모드가 있다면

모르는 건 무조건 물어본다는 태도다.


쿠팡에서 내가 새삼 깨달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묻는 일에

꽤 주저함이 크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것도 모르냐,

이 정도는 상식 아니냐,

이런 것도 모르고 일하러 온 거냐 등

교육이 아예 필요 없는 경력직 신입을 바라는 일터가 유독 많은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눈치는 곧 능력이 되는 게 이유일 수 있을 것 같다.

 

눈치껏 알아서 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표현일 텐데,

왜 우리나라 일터에서는 일을 가르치지 않아도 직원들이 알아서 잘하기를 바라게 된 것일까?  


눈치가 없어서든 그냥 못하는 것이든,

처음부터 일을 잘할 수 없는 건 쿠팡에서는 당연하다.


쿠팡은 이전에는 없었던 공간, 쿠팡만의 시스템으로 물류센터를 운영한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쿠팡과 불과 하루짜리 근로계약을 맺지만

그럼에도 물류센터가 굴러가는 이유는 쿠팡은 쿠팡에 일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쿠팡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기본으로 깔고 관계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업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알려줘야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

모르면 배우면 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업무의 방식은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

쿠팡의 방침으로 보였다.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럽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에 무력하게 있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어른들에게

쿠팡은 확실히 불안함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모른다는 것,

아예 모르기 때문에 잘할지 어떨지도 모른다는 것,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곳에 내던져진 기분은 편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게 된 게

누군가 내 무지와 실수를 비난하고 나 자신부터 나의 그런 모습을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이를 먹었을 뿐 세월로부터 세상의 모든 일을

배우지는 못했다는 것부터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을 잃어도 괜찮을 권리,

몰라도 비난받지 않을 권리는 그저 권리가 아니었다.


그걸 배우기에 쿠팡 알바는 가장 적당한 교실이면서,

동시에 혹독한 배움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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