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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Aug 12. 2019

[직장생활] '열심히'라는 단어의 함정

네트워크 운영 엔지니어로 지낸 5년

예상치 못한 근무형태


이직한 후 내가 배치 받은 부서는 통신네트워크운영실이다. 5년 근무하면서 하는 일에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문장이 바뀔 때마다, 조직 구성이 조금 바뀔 때마다 이름이 거의 매년 바꼈다. 그때마다 현판을 바꾸고 직원들의 명함을 다시 파는 일들을 했다. 운영부서라 쓸모없던 명함들은 항상 쓰레기통행. 내가 아주 싫어하던 돈지랄이었다.


어쨌든,

내가 하던 일은 간단히 말하면, 핸드폰 통화하는 데 필요한 기계들 중 기지국, 중계기 등이 물려있는  최상위 단에 있는 대형 통신장비에 문제가 발생하는지 모니터링하고, 새로운 시스템 업데이트가 나오면 적용하는 일을 '관리'하고 긴급 상황, 예를 들어 핸드폰이 안되는 상황에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이 부서에 배치받은 것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우습게도 이전 직장에서 근무했던 부서 이름이 네트워크 운영실이었기 때문이다. 하... 그 네트워크 장비랑 이 네트워크 장비랑, 그 네트워크 방식과 이 네트워크 방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 상관이 없다고!


통신장비운영실 근무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24시간, 365일 모니터링을 해야한다는 점, 그러니 자연스럽게 밤일을 해야한다.

통화에 영향을 줄 만한, 기계에 손대는 일은 핸드폰 사용향이 가장 적은 새벽2시에서 5시 사이에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달에 7일정도의 밤근무와 두번 정도의 주말근무가 시작되었다.

일주일을 표현하면 주주야주야주휴(주간주간야근주간야근주간휴일) 뭐... 이런 리드미컬한 근무랄까. ㅎ

야근을 할때는 저녁 6시에 출근해서 아침 9시에 퇴근하는 일정이다. 한달에 7일이 이런 근무라면 한달에  보름정도의 밤낮이 바뀌는 불규칙한 생활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직장생활을 상상하면서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근무형태다. 야근이 아닌 교대근무라...

거참 당황스럽지만 장점을 좀 찾아보자. 어디보자...


그래, 자유시간이 많다!

야근근무일 땐 넓디넓은 사무실(대형 장비가 수십대 넘게 들어간 통유리로 된 장비실을 끼고 있으니 인원수에 비해 사무실이 정말 넓다)에 선배 한 명이랑 둘이 근무하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정해진 업무 외에 할 일이 별로 없다.

이럴 땐, 놀자면 놀고, 공부하자면 공부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다!

야근 근무 중에 큰 일이 발생하지 아니하여 푸욱 쉰 후 아침 9시에 퇴근하면 하루가 온전히 나의 것.

평일 낮 시간에 하고 싶은 것들,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

그때만해도 20대였던지라 밤샘 근무를 끝내고 바로 요가원에서 운동도 하고 낮시간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밤에는 술도 펐다.


게다가, 돈을 많이 번다!

수당이 붙는 야근 근무를 월에 몇십시간을 해야하고, 종종 주말 낮근무나 주말 야근근무가 잡히면 수당이 확 올라간다. 동기들에 비해 월에 40에서 50만원은 더 버니까 연봉으로 치면 꽤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실제로 과장급 이상의 경우 기본급여가 높으니 수당도 아주 높아서 주말야근을 선호하는 선배들도 종종 있었다. 주말에는 특별한 작업들도 잡지 않는 편이니, 집에서 애를 보거나 잔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일한다고 생색내며 출근해서 여유롭게 돈도 많이 번다. 선배들이 그렇게 영화광이 되더라.


아하하하하하 이런 굵직한 장점이 세 가지나 있다니! 나의 이직은 정말 나이스했어~ 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곧 단점을 알게, 정확히는 온 몸으로 두드려 맞게 된다.


자유시간이 많다? 

몇 번의 작업 사고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기계가 항상 논리적이고 예측 가능할 것같지만 오래도록 운영되고 있는 기계는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종종 발생한다. 쓰레기 값들이 쌓이면 오작동을 하게 되고 그럴 때 흔히 말하는 '껐다켜'를 하는 일이 생기는데, 때론 이 놈들이 '안켜'지는 대참사가 생기기도 한다.

이판(엔지니어들이 일하는 판)에 '기계가 신입을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픽 웃었는데, 내가 야근하는 동안 대형사고가 서너번 나서 대환장 난리 파티를 한 적이 꽤 많다.

업데이트를 위해 껐던 장비가 그만 쉬고 싶었는지 살아나지 않아서,

24층짜리 건물 전체 전기를 담당하는 전원실에 사고가 나서,

(실제로 이 때는 정말 대형사고였다. 3시간 후면 기계를 뭐부터 끌지 대책회의를 새벽 4시에 했다.)

백업장비 테스트 중에 복구가 되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 등등

연이어 대환장파티가 있었다.

이럴 땐 협력사 담당 엔지니어부터 팀원 전부를 새벽 세네시에 불러들여야한다.

그럴 땐 내가 잘 못한 게 없어도 내가 야근할 때 벌어진 일이기에 죄인이 된듯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주간보다 야근할 때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해야했다.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다?

그래, 근데 남들 놀 때 일하는 게 좋으니, 같이 노는 게 좋으니? 장기 휴가도 못가, 니가 빠지면 다른 사람이 야근을 대신해야하니까. 아무리 남들 일할 때 노는 맛이 있어도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야 재밌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돈을 많이 번다?

처음엔 월급통장에 찍히는 돈에 현혹되어 기분이 아주 좋다.

'오, 이러면 금새 부자되겠는데?'

그러나 밤새 일하고, 주말을 고정적으로 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점점 그 돈의 가치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기 시작한다.

그리고 밤낮이 불규칙한 생활을 2년 정도 했을 때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몸이 안좋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 한약을 몇달간 지어 먹었다. 야근해서 번돈으로 약을 사먹은 꼴이다. 물론, 야근근무 안하고도 몸이 나빠졌을 수도 있지만, 불규칙하게 밤낮이 바뀌는 생활이 건강에 나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왜 20대 젋은 직원들에게 네트워크 운영실이 인기가 없는지, 왜 그동안 여직원이 없었는지(또 유일한 여자팀원이 되었다), 한번 들어오면 대체할 사람을 받드시 찾아놓고 부서이동을 해야하는지 등 현실을 알게 되고, 슬슬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이런 근무 조건을 미리 알고 내가 선택했거나, 이런 근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좋을 만큼 일이 나에게 잘 맞다면 문제 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나는 나의 성향을 무시한 채 이직을 했고, 회사에서는 빈자리에 인력 보강을 할 뿐이고, 나는 어떤 일이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문제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큰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열심히'라는 단어의 함정


과연, '열심히'만 하면 다 되는 걸까?  

나는 '뭐든' 열심히 하다보면 일을 배우고 회사생활 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본인의 성향과 일에 대한 성취 방식을 무시한 직군 선택은 곧 일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통신운영실은 안정성과 규칙적인 관리가 중요하다.

어제의 일이 오늘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일년 동안의 일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고, 특별한 이슈가 생기지 않을 때 잘 돌아가는 통신실이다. 이런 루틴한 일상을 즐거워 한다면 좋을 업무다.


나라는 인간은 시작과 끝이 명확한 프로젝트성 일을 좋아하고 새로운 일을 벌리는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 운영실에 근무하는 5년간 선배들이 나한테 제일 많이 한말이

"일 벌리지마라"

였다.


운영 메뉴얼이 오래되어 업데이트 겸 다시 만들어야할 것같다고 했을 때도,

기계를 납품하는 협력사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교육에서 자료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교육을 다시 해야한다고 했을 때도,

야근 근무에 대한 수칙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을 때도,

선배들은 궂이 그런 일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다.

아니다. 이건 너무 신사적인 표현이다. 그냥 싫어했고, 귀찮아했고, 다해봤는데 별로 쓸데없고, 꼬꼬마 신입사원이 나댄다는 식이었다.


하루는 무성의하고 의미없는 협력사 교육이 지속되는 상황이 싫어서

"이런 식으로 할거면 교육을 하지 말던지, 제대로 된 교육 자료를 만들어오는 게 좋겠다"

라는 말을 했다가 협력사가 아니라 선배들에게 싫은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선배들이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었고 내가 설쳐대서 민폐끼치지 말고 조용히 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다는 것, 고민과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라는 것,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 등 나의 성향을 무시한 채 이직을 했고, 2년 이후부터 팀이동을 요구했지만 대체할 인력을 구하지 못해서 불가능했다. 결국, 퇴근 후 삶을 위해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몰입과 성취를 얻을 수 없다.

성향을 무시한 채 일이란 걸 하다보면 결국, 그냥 타성에 젖어 주어진 일을 하게 된다.

혹자는 회사생활하면서 무슨 자아실현이라도 하려고 했냐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인생에 있어 어떤 일을 하느냐, 그 일이 나에게 잘 맞느냐, 내가 그 일에서 몰입과 성취를 경험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몰입과 성취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로선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5년을 꽉채우고서야 팀을 이동할 기회가 왔다.

팀을 이동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한다.

'나대지말자, 튀지말자, 이번엔 진짜다!'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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