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자폭할 걸 결심은 왜 하니
그렇게 다시 신입사원이 되었다. 한방에 철없던 과거를 잊고, 새 출발 하기 딱 좋은(?) 결정이었다.
퇴사처리가 끝나고 일주일의 여유도 없이 입사하면서 다시 한 달간의 합숙연수가 시작되었다.
이직을 하면서 첫 번째 목표가 '튀지 말자'였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 직장에서 사고를 치기 이전부터 나는 '튀는' 신입사원이었다.
이직 당시 나는 28살이었다. 그럼 전 직장은 27살의 신입. 그때도 늦었다는 말을 꽤나 들었었다. 요즘은 늦게 취업하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신입일 당시에는 여자 27살 신입은 드물었다. 여자 동기들이 나보다 세네 살 어렸고,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이랑 동갑이었다.
이게 별문제가 아닌 듯보이지만 부서 배치를 받으면 여자 대리와 동갑일 테니 회사 입장에서 나이 많은 신입이 좋을 리 없다.
취업이 늦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대학교를 한 번 옮기면서, 아빠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등록금 문제로 휴학, 실무에서 개발을 좀 배워보겠다며 인턴쉽 하느라 휴학... 등의 이유로 신입치고는 나이가 많았다. 취직한 게 천만다행인지도.
합숙연수 중에 교육을 하러 방문한 선배님들이 신입사원들의 명단을 훑어보다가 종종 내 이름을 불렀다.
"자... 어디 보자.... 흠...ㅇㅇㅇ 누구야?"
"네!"
"뭐야. 왜 이렇게 나이가 많아? 군대 갔다 왔어?"
"아... 하하하. 네!"
그 와중에 '네'는 뭐냐.
나의 나이 많음이 아이스브레이킹(Ice Breaking)으로 종종 사용되었고, 덕분에 많은 선배들이 나를 기억했다. 재미없는 농담에 써먹었으면 이름 정도는 기억해줘야지.
그때의 나는 참 해맑았다. 지금 같으면 코웃음 치고 말 농담이었다.
합숙연수 때는 공식적으로(?) 금주였지만, 현장 연수 동안에는 거의 매일 술자리였다. 현장연수는 각 부문별로 대표 부서를 돌면서 회사 전체의 업무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새로운 신입들이 왔다고 교육 끝에 선배들이 술자리를 마련했고, 종종 그 자리에 하늘 같은 임원들이 동석하기도 한다. 이때 술을 잘 먹으면, 회식의 최후 멤버일 경우에는 특히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솔직히 까놓고 그때는 술을 아주 잘 마셨다.
그런 나에게 선배들이 사주는 근사한 저녁과 술자리는 꽤 신나는 일이었다.
대학생 때 가던 싼 술집과는 레벨이 다른 음식과 술들을 사준다고 하니 충분히 즐겼고,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딱히 일찍 귀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항상 마지막까지 선배들이랑 술잔을 기울이는 멤버 중에 하나였다. 요즘은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사실 요즘 정확히 어떤지 잘 모른다^^; 어쨌든)
'회식도 일의 연장이다'
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때는 술 먹고 으쌰 으쌰 하는 자리에 적극적이야, 특히 매니저가 그런 걸 좋아하면 싫어도 회식에 적극적이어야 했다. 적어도 내가 소속된 남자가 과반수가 훌쩍 넘는 조직에서는 그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는 대로 척척 먹고 마시고, 선배들이랑 웃고 떠드는 나의 존재는 신입이 30명 정도 되는 상황에서 금세 소문이 났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선배들은 안 무섭다. 후배들이 무섭지. ㅎ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일로 만난 사람들과는 가급적 술 마시는 걸 피한다는 것과 눈에 띄게 줄어든 주량이다.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이 달라진 게 있다면, 사실 그 회식자리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최적의 소맥 비율을 배운 것 외엔... 남은 게 없다. 궁금하신 분들은 언제 한잔? ㅋㅋㅋ
'ㅇㅇ기업에서는 축구를 잘하면 원하는 부서에 갈 수 있어'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지.
어이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큰 조직일수록 정기적인 체육행사가 있고, 연중 한두 번 개최되는 사내 큰 이벤트다. 그러니 일정이 잡히면 은근히 부서별 경쟁심리가 발동된다. 상품도 꽤 크고, 팀장님 자존심도 걸린 일이다. 그리고 여직원은 축구를 뺀 모든 경기에 차출당했다. 여자가 적은 조직에서는 이처럼 마치 상징적 존재가 된 듯 느끼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7년 정도 100미터 단거리 선수였다. 그리고 운동을 고3 때 외에 쉬어본 적이 없는 운동 마니아다.
현장 배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부문 체육 대회에서는 축구를 제외한 전 종목에 나갔는데 이게 뭐라고 최선을 다했고, 달릴 때는 전력질주를 했다.
그때 선배가 찍어줬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 악물고 달리던 나의 사진은 지금 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전국체전 출전한 줄.
어쨌든 전력 질주로 400 계주를 역전시킨 나는 부문 전체에 체육특채신입으로 각인되었다.
나는 나의 이런 튀는 행동들, 이런 나의 캐릭터가 지난 모든 일들, 사수에게 미움을 받고, 성질대로 사수를 들이받고, 충동적으로 이직을 결정한 모든 일의 발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직하면, 절대로 절대로 눈에 띄지 않고 얌전히 지내겠노라 결심했다.
자.. 연습을 해보자.
'술은 잘 못해요'
'운동은 안 좋아해요'
'군대는?'
그래... 나이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치자.
연수원에서 한동안은, 며칠 정도는 이 결심이 잘 지켜지는 듯했다.
그리고 조용히 지내겠다는 결심을 한방에 날려버릴 사고를 치고 만다.
합숙 시작 며칠 후, 공채기수 반장을 뽑는 선거를 했다.
인사팀에서 지원을 받겠다고 했고, 동기들 중에 남자 세명(정확치 않지만 그런 것 같다)이 출사표를 던졌다.
"자 각자 왜 본인이 반장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보세요"
A군이 말했다.
"저는 여자 친구가 스튜어디스입니다. 솔로인 동기들을 위해 단체 미팅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튜어디스 수백 명이 대기 중입니다"
'읭? 반장이 돼야 하는 이유가 미팅이라니. 뭔 소리래'
B군이 말했다.
"저는 원래 이런 건 일단 지원합니다. 저는 (블라블라)"
이 내용 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장이 되어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대도록 하지 그러니...'
그리고 C군은 기억이 안 난다. ㅎㅎㅎ 임팩트가 별...
이걸 듣고 있자니, 쓸데없는 정말 쓸데없는 정의감이 올라왔다. '미팅'과 '일단 지원한다'가 반장이 될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나 그깟 기수 반장이 뭐라고 의미부여를 하냐. 나는 생각과 동시에 행동을 해버리는 순발력(?)의 소유자다. 내 손이 번쩍 올라갔다. 하...
"과장님, 지금 지원해도 되나요?"
'아.. 미친..'
바로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 좋아"
"저는 엄마 같은 반장이 되겠습니다. 동기들 누구도 낙오 없이 연수를 마치도록 이끌겠습니다"
뭐 이딴 소리를 짧게 했다.
와.... 또라이야. '엄마 같은'이라니. 너 진짜 뭐래니.
눈을 감고 거수로 짧게 진행된 투표가 끝나고 과장님이 말했다.
"이번 기수에는 엄마가 필요한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그렇게 나는 기수 반장이 되었고, 조용히 지내자는 굳은 결심은 스스로 밥 말아먹었다.
넌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