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2탄 - 그땐 내가 똑 부러지게 잘 한 줄 알았지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면 사람을 대상으로 흥분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 직후에 다시 현실을 직면하기 전에 겪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그가, 누구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여전히 흥분했던 감정의 잔재가 남아 혈압을 끌어올리고 심박수가 널뛰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
당시 상황을 복기해본다.
‘생각해보니까 그때 할 말을 다 못 했어. 두 번 다시없을 기회였는데. 이 자식 한번 더 걸리기만 해라. 그땐 내가 진짜 그때는 그냥 확 마...’
아깝게 놓친 첫 번째 기회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되새기며,
두 번째 다가 올 기회에 대한 시나리오를 꼼꼼히 그리고 잔인하게 짜 본다.
곧 지나친 흥분으로 인해 체력이 고갈되고 심박수가 떨어지고 나면 현실을 깨닫고 이불킥을 하게 된다.
같은 상황을 두고 조금 전까지는 더 독하지 못했던 나와, 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후회가 가득했다면
이번엔 쏟아낸 말들을 두고 후회가 시작된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자기 합리화도 슬쩍 섞어본다.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내가 좀 심했나... 그치만 그 인간이 그동안 너무 심했잖아. 하....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안 그래?(누구한테 묻는 거냐) 그래도 그때 ‘야’라고 부른 건 좀 심했나? 선배한테 삿대질은 하지 말걸. 과장님이 말릴 때 끝낼 걸 그랬어. 아.. 이제 팀원들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잘 못했다고 할까? 기억 안나는 척할까?'
머리를 쥐어뜯고 이불킥을 한다.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흥분과 후회의 반복으로 감정의 널뛰기가 시작되고, 내가 이러려고 퐈이팅했나 싶고, 결국 지쳐서 내 행동의 의미가 무엇이었나 싶어 진다.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러니 모르는 척하거나 줄행랑 칠 방법을 찾아보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막상 닥치면 그냥 철없는 신입사원의 술주정으로 지나갈 수도 있고, 내가 또라이라는 걸 눈치챈 사수가 조심하게 되어 나의 회사생활이 나아질 수도 있고, 이 일이 팀장님 귀에 들어가 사수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이런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냥 막연히 '이제 나는 어쩌나, 선배들 얼굴을 어떻게 보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땐, 자연스레 도망가고 싶어 지는 법.
호기롭게 질러댈 땐 언제고 결론은 참으로 초라하다.
주말 동안 4단계에 도달한 나는 지난 10개월간 신입사원 생활이 부족했는지(경력 1년은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으니 다시 신입 ㅎ), 다른 회사에 신입사원 입사 지원서를 후다닥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4단계의 적극적 실천을 위해 월요일을 맞이하여 취준생 친구를 불러내 롯데월드를 갔다. 대기줄도 없이 온갖 놀이기구를 원 없이 타니 아무 생각이 없어서 참 좋았다. (그냥 그랬다고요.)
회식 테러 이후 무단결근까지 참 잘했어요.
화요일 아침, 이틀 무단결근하면 누구든 집으로 잡으로 올게 뻔했기 때문에 정말 마지못해 출근했다.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 수십 통의 전화를 모두 씹고 무단결근을 하고 나타난 신입사원이 팀장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팀장님은 혼자 객지 생활하는 신입사원을 위해 본인의 아침인 삶은 고구마를 책상에 놓고 가시던, 누구보다 정이 많은 분이셨다.
"너 이 새끼, 선배들 전화 다 씹고 뭐했어?"
"롯데월드 갔는데요"
"뭐?" (잘 안 들렸던지, 귀를 의심했던지... 크게 반문하셨다.)
"롯데월드 가서 놀았어요"
"와... 이 새끼 봐라. 무단결근하고 롯데월드 갔다고 말하는 놈 처음 보네. 차라리 아팠다고 해"
"롯데월드 가서 놀아서 놀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아팠다고 하라시면..."
"아... 진짜 이거 웃긴 놈이네. 다시 무단결근하면 짤라버린다. 가서 일해!"
니가 장금이냐...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는데 왜 홍시맛이냐고 씨부린거냐...
정말 그때의 나는 대책이 없었구나.
나중에 내가 매니저가 되어보니 어쩌면 팀장님은 거짓말이라도 아팠다고 하길 바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은 분명 그날의 일을 들으셨을 텐데, 아무 말도 없었고 팀장님과의 상황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물론, 다른 팀까지 100명이 근무하는 넓디넓은 사무실에서의 수군거림은 불가피했다.
가해자, 피해자 이런 단어를 쓰면 너무 살벌해 보일 수 있겠지만, 다툼이 생겼을 때 이것처럼 명쾌한 표현도 없다. 내가 범죄 수사물, 범죄심리물 덕후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상황을 놓고 보면, 문제의 시작은 나의 사수였다. 신입사원을 잘 끌어주라고 사수로 배정했으나 멘토링은커녕 제대로 된 선후배 간의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고, 나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 적도 없으며,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니 잘 못은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선배에게 쌓인 감정들을 실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막말을 던진 순간, 상황은 역전된다.
정당방위라고 처벌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다. 그저 경감될 뿐.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한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 거나 혹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팀원들은, 그리고 다른 부서 사람들은 나와 나의 사수 간에 벌어진 일들을 구체적으로 알기도 어렵고, 안다고 해도 그 감정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러니 선배가 몇 번 망신 좀 줬다고 혹은 놀렸다고 회식자리에서 막말을 쏟아낸 신입사원은 개념 없는 요즘 것이 되었고, 사수는 드센 후배한테 욕본 선배가 되었다.
입장의 전환. 그래 이제 니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겠지.
입사 11개월 내 사회생활의 첫 사표를 썼다.
다행히도 홧김에 지원한 회사에서 서류와 면접을 통과하고 입사 결정이 났다. 그만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건도 좋았고, 저지른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퇴직 의사를 밝히고 일주일 정도 시간이 남았던 나를 팀장님은 내내 설득하셨다.
내가 그때 이직을 한 걸 후회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을 지금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은
이직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도피였다는 것이 첫 번째다. 겨우 술자리에서 친 사고 하나가 뭐라고, 아마 잠시 선배들이 또라이라고 했겠지만 곧 잊을 일이었고, 내 직장생활이 편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도피를 택했다.
두 번째 후회되는 건, 이직할 회사를 선택한 기준이 그 당시 신입사원을 뽑고 있는 회사였다는 것이다. 물론 조건이 나쁘지 않았지만, 좀 더 심사숙고해서 그 참에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정말 대기업에 맞는 인간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대기업형 인간은 아니므로.
그다음 제일 후회되는 것은 사수를 제외하고는 다 좋은 사람들이고 나를 아꼈다는 것이다. 겨우 이직 사유가 그 인간 하나를 잘 못 다루어서라니, 한심했다.
그렇게 나는 첫 직장과 이별하고 다음 직장으로 옮겨 간다.
내 목표는 하나였다. 제발 튀지 말자. 목소리 내지 말자. 그냥 조용히 살자.
신입사원의 패기 같은 건 넣어두고 그냥 죽은 듯이 일만 하자.
그게 나의 목표였다. 그래 단지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