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1탄 - 이 구역 미친년은 나다
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의 IT계열사였다. 딱히 어떤 의지나 목표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전공에 맞게 대기업에 쓴 원서 중 하나였고, 가장 먼저 합격통보를 받은 회사였다.
그 이후 합격 연락이 온 회사들도 있었지만 딱히 재고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배정받은 팀은 그룹의 네트워크망을 통합하고 운영하는 일을 하는 팀이었다. 당시 그룹은 수십 개의 계열사가 있었는데 각 계열사가 별도의 네트워크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부품과 완제품 간의 재고 관리, 국내외 판매현황, AS 등에 대한 관리가 통합되어있지 않았고 당연히 이로 인해 업무 효율이 떨어졌다. 우리 팀의 역할은 그룹 간의 네트워크 망을 논리적, 물리적으로 설계, 구성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일을 가르쳐 줄 '사수'가 생겼다.
*사수 : 업무뿐 아니라 회사 생활 전반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주는, 특히 신입사원에게 중요한 인물
나의 사수는 7년째 사원이었다.
기업마다 승진 조건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그 회사는 3년 차(4년 차였나..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치 않다) 이후부터 토익 500점(그 정도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된다)을 넘기면 무조건 대리 승진이었다. 900점 아니고... 500점. 그러나 그는 7년 차 사원이었다.
나의 사수의 사수가 제발 시험을 보기라도 하라고, 그러면 승진할 수 있게 해 주겠노라고 달래도 나의 사수는 굴함이 없었다. 등록을 안 한 건지, 했지만 점수가 안 나온 건지 알 수는 없다.
나의 사수는 회식 다음 날은 전화로 회사를 때려치운다고 하고 잠적을 하기도 했다. 듣기로는 며칠간 잠적한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래도 팀장은 사수의 사수를 집으로 보내서 잡아와 팀으로 복귀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이 어이도 없지만,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 눈에 우리 팀은 끈끈한 팀워크로 뭉쳐있었고, 나는 그런 우리 팀이 좋았다.
내 사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 팀은 업무의 성격상 여자팀원이 오기 쉽지 않았다.
계열사들이 업무를 멈추는 시간이어야 네트워크에 손을 댈 수 있었으니,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날들이 종종 있었고, 시스코 라우터, 스위치를 들고, 선을 끌고 설치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동안 여자 팀원을 원치 않았고, 팀이 생긴 이래로 내가 처음이었다.
신입사원 연수과정에서 꽤 힘들게 생활했던 나에게서 무슨 가능성을 본 건지 담당 상무님이 나를 데리고 왔고, 덕분에 모두의 관심을 받던 나를 나의 사수는 무시와 구박으로 관심을 표했다.
따지고 보면 누가 나를 싫어한다는 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게 사수라는 것은 직장생활의 큰 문제였다.
나는 그와 잘 지내고 싶었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딱히 소용은 없었다.
사수의 행동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사수가 공개적으로 나를 망신 주는 일이었는데,
단적인 예로 사수는 종종 팀 회의에서
라고 말했다.
흠... 내가 천재는 아니어도, 머리가 나쁘단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둘이 일할 때 별말 없다가 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그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몇 가지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처음엔
'하하하하. 농담인가? 아닌가? 아씨. 내가 뭐 잘 못했나? 뭐지?'
그다음은
'하.... 그래 어제 나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을 거야.(정확히 뭔지 모름). 내일은 더 잘해야지'
그러다
'근데 이 색히가 왜 자꾸 머리 타령하지? 니 머리는 얼마나 좋은 거지?'
그리고 알게 된다.
'아... 머리 타령이 아니구나. 이 색히 그냥 내가 싫구나. 나를 밟고 싶구나'
이걸 깨닫고 나면,
'내가 이딴 소리나 들으려고 잠 설치며 공부하고 대학 나오고 취업했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이런 상황을 참기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분하고 억울하다. 한판 붙고 싶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잘하고 싶었던 나는 사수와 잘 지내고 싶었고, 그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인간은 내가 왜 그렇게 싫었을까?
입사 10개월, 사수와 일한 지 8개월,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회식이 잦았던 우리 팀은 금요일 저녁 팀 전체 회식을 했고, 나는 취했다.
다음 날 회사를 때려칠 지언정 항상 회식에 적극적이었던 나의 사수는 회식을 빠지고 남아서 일을 하고 있는 팀원에 대해 일을 못해서 늦게까지 일한다, 팀워크가 뭔지 모른다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안주가 된 그 선배는 회식은 싫어했지만 일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술이 취한 나는 사수의 말을 듣다가 그만 속마음을 입 밖으로 쏟아내 버렸다.
팀장님만 귀가하고 모든 팀원이 남아있는 2차 자리.
뭐... 이딴 내용의 말을, 미친 소리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타입이라 주정으로 누구한테 화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헤어진 남친한테 정도... 당시에 나는 선배가 그간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줬던 것에 분한 마음이 꽂혀서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모양이다.
사수는 귀신을 본듯한 표정으로 말문이 막혀서 나를 보기만 했고, 선배들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와 사수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팀원들은 둘을 화해시키려 갖은 애를 썼지만 될 리가 없었다.
입사한 지 10개월 된 팀 막내가 애물단지 사수한테 삿대질하며 화를 내고 과장님, 차장님을 비롯한 선배들 모두가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미친년 하나가 망쳐버린, 금요일 밤, 혼돈의 회식자리가 그렇게 끝이 났다.
차라리... 그냥.... 조용히 데리고 나가 맞짱을 뜨지 그랬냐... 이 미친X아...하...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