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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Oct 10. 2019

[직장생활] 또라이가 또라이를 만났을 때

저는 팀장님이 싫습니다

했던 일이 어땠는 지 서사적인 나열은 이제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보니 커리어 관리도 제대로 못한 ㅂㅅ인증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만방에 알리며 떠드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ㅠㅠ  




나의 마지막 팀장(님은 생략하겠다)


오늘은 나의 마지막 팀장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대기업을 그만두고 벤처로 이직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해주신 이분은 시간이 지나고 지나 이미 7년이 흐른 후지만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내가 퇴사를 한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이 끔찍한 팀장이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가끔 왜 내가 그 인간이 퇴사의 큰 부분을 차지했나 한심할 때가 있지만, 실제로 회사가 아무리 좋아도 끔찍한 상사와 일하는 팀은 퇴사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매니저는 팀원들을 잘 이끌고 갈 책임과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하루에 열두번쯤 변하는 그의 기분

을 나는 맞춰줄 재간이 없었다. 왜 일이 아니라 그의 기분에 집중해야하는가. 도데체 보고서를 들고갈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팀에 온지 1년 반쯤 지난 어느 날 나를 미쳐버리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날 아침,

전날 외부 회의를 다녀와서 관련 내용을 보고해야하는 상황이라 출근한 팀장님 기분이 어떤가 봤더니

'오~괜찮아. 이때다!'


"팀장님, 어제 회의 내용 보고 언제할까요?"

"뭘 귀찮게 보고서를 쓰고 그래. 간단하게 이메일로 보내"


'휴. 나이스 타이밍'


그러나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내 이메일을 보았을 때 그의 기분은 오전과 완전히 달라졌던 모양이다.

회계감사 기간이라 대회의실에 전담반을 꾸려놓고 팀원들이 모두 모여서 일하고 있는데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팀장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나의 사수에게 종이를 한장 집어던진다.


"야! 너 이거 읽어봐. 보고하랬더니 복길이가 메일을 이딴식으로 보냈어. 이거 한글이야?"


'야'는 일반적으로 팀장이 우리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고, '복길이'는 내가 팀에 오고 얼마 안되서 팀장이 마음대로 붙인 내 별명이다.


다들 폭풍이 시작됐음을, 그 대상이 나임을 직감했고, 모두 침묵했다.

맹세컨데, 이런 맹세를 왜해야하는 지 모르겠지만, 그 메일은 그저 그런 보고 메일이었다.

회의 참석자와 간단한 회의 내용, 그리고 팀장이 알아야할 이슈들.

근데 한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해를 할 수 없게 썼다는 소리다.

팀장은 메일을 친절히 출력해와 팀원들 앞에서 나를 한글도 모르고 이메일도 못쓰는 병신을 만들어가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내 코앞에 그걸 던졌다.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실제 상황인지 꿈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날뛰는 팀장을 앞에 두고 그대로 회의실에서 뛰쳐나와 화장실에 처박혀서 울었다. 그 인간 앞에서 울면 진짜 죽어버리고 싶을 거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내가 일처리를 얼마나 잘못했는지, 일을 잘 못했더라도 왜 이런 형태로 인격모독을 당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회사 건물에 있을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집에 가버렸다. 선배들이 전화를 수십통했지만, 나는 이성잃은 팀장을 방치한 선배들, 몇년간 그를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그들도 보기 싫었다.

이게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운 기억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행동하는 그 인간이 나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는 저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 엿먹이고 싶었다.


이런 일은 나에게만 벌어진 건 아니다. 팀원들에게 돌아가며 일어났고, 우리팀은 막내들부터 이탈하는 팀이었다.




너의 커리어 따윈 관심없어요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반드시 이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팀장이 나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침 인사교육팀에서 인원을 충당한다는 공지가 떴는데 - 빈자리가 생기면 사내공개모집을 통해 자리를 순환시키는 구조로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이 있었다 - 네트워크운영팀에 있을 때도 한번 시도한 적이 있었던 팀이었다. 당시에는 직급이 맞지 않아서 못갔지만 이번엔 꼭 가고 말리라.

교육팀 팀장님께 메일을 보냈고, 면담을 했고,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교육팀 인사권자가 우리팀으로 연락을 하면 인사이동 절차가 시작된다.

그러나 발령이 나기 전, 팀장과 상무님의 거센 태클이 시작됐다.

우리팀엔 내가 필요하고 그래서 보내 줄 수가 없다는 게 이유다.

나는 나의 커리어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가겠노라 다시 주장하다, 부탁하다, 사정을 했지만

팀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말로 나를 조직의 이익따위는 무시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며 상황이 종료됐다.


한글도 모르고 업무보고 메일도 못 쓰는 인간이 언제부터 그렇게 소중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나에게 한글을 모른다며 출력물을 집어던질 때보다 더 화가났다.


비전은 스스로 찾는 게 아니다 

가끔 비전은 스스로 찾아야 된다는 개똥같은 소리를 하는 매니저나 조직이 있다. 비전은 조직이, 회사가 구성원들에게 제시하고 설득하고 그 비전에 너의 인생을 걸어달라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려 보여줘야하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못하겠으면 적어도 구성원이 원하는 가고자 하는 길을 방해하는 짓 따위는 하면 안된다.


창업 후, 2017년에 실리콘밸리 연수를 갔다가 방문했던 Zappos는 1999년 창업 후 10년만에 신발 온라인쇼핑몰로 연매출이 1조를 넘는 유니콘으로 성장했고, 2009년 아마존이 거액을 지불하고 인수했다. 이 기업은 재밌는 복지와 성공한 조직문화로 유명한데, 거대 기업이 된 이후에도 이런 기업철학이 유지되고 있다.

재밌고 부러워 미칠 듯한 내용이 많지만 나의 경험 때문인지, 구성원이 원할 경우 어느 팀에서든 일할 기회를 준다는 룰이 제일 눈에 띄었다.


사회 초년생일 때 우리는 내가 어느 영역에서 일했을 때 가장 빛을 발할 지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입시전쟁만 치르다 성적에 맞춰 들어간 대학을 졸업해버리면 내 적성이 무엇인지 알기 더더욱 힘들다. 운이 좋으면 전공살려 취업하지만 그나마도 내가 내 전공이랑 맞는 인간인가 싶은 게 현실이다.

수학 성적 좋으면 이과, 수포는 문과.


너무 멀리 왔네. 다시 또라이 팀장 이야기로 돌아가자.




망할놈의 술자리


팀장은 주5일 근무에 5일을 술이 취해서 귀가했다. 이유는 어떻게든 만들어냈다.

우습지만, 월요일이니까 마시고, 화요일이니까 마시고 진짜 이런 식이었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는 팀에 적응도 해야겠고, 팀원들 다들 함께 하는 자리에 빠지기도 그렇고, 술을 싫어하지도 않는 편이고 그러니 함께 했는데 이게 반복되니 너무 한다 싶었다. 무엇보다 다음 날 오전 업무가 제대로 될리가 없다. 도데체 선배들은 어떻게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한 건지 놀랍기만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빠진 술자리에 나를 불러내는 일이다. 내가 이 호출에 응하지 않을 때 팀장은 종종 분노하곤 했다.


어느 불금 밤 12시. 지금의 남편과 홍대 인근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차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술만 마시면 불러내는 더러운 전적이 있었기에 불길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받으면 말겠지 생각는데 전화가 열번이나 온다.

'회사에 사고가 터졌나? 요즘 시즌이 사고날 시즌이 아닌데, 뭐지? 술이 많이 취했나?'

결국 집요함을 못견디고 전화를 받았는데 당장 을지로 어딘가로 오라는 것이다. 이유는 팀장과 차장, 우리 담당 상무님이 우리부서 관련 공무원들과 술을 마셨는데 높으신 공무원과 상무님이 내기가 붙었다.


내기 종목은 두둥! 김과장이 이 시간에 부르면 올까? 안올까?

(우리 부서는 공무원들과 협력을 하는 일이 많아서 종종 접대를 하곤 했다. 그 높으신 공무원 양반은 나를 참 좋아라했다.)


자. 지금은 금요일 밤 12시다. 여직원을 술자리 내기용으로 불렀다. 그것도 룸주점으로.

상상이 되는가.


"차장님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전화 그만하세요"


화를 내면서 끊었지만 전화는 그칠 줄 모르고 왔다. 보다 못한 남친이 그냥 가서 얼굴만 보여주고 나오라며 나를 차로 데려다 줄 지경이었다. 나올 때 전화하면 데리러 오겠다며.


결국 내기에서 이긴 상무와 팀장은 목에 깁스를 한채로 행복해졌고, 높으신 양반도 이런 직원이 있는 팀과 일해서 기분이 좋다며 행복해했고, 나는 목 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흐릿하거나 퇴색되어 아름답게 필더링되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저는 팀장님이 싫습니다


팀장과의 갈등, 직군에 대한 고민, 커리어 관리까지 막힌 이후 진지하게 이직을 고민하고 있을 때 벤처기업 대표인 지인에게 제의가 들어왔다. 이런 저런 고민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팀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메일 사건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팀 이동을 시도하자, 팀장은 한동안 내 눈치를 보는 듯 조심했는데 내가 아예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매우 당황했다. 내가 그만두면 막내가 세번째 팀을 이탈하는 상황이고 몇년 째 임원 승진을 물먹고 있는 팀장은 인사상 불이익을 피할 수 없고 코너에 몰리게 된다.

팀장이 나를 회사 카페테리아로 불렀다.


"내가 잘 못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그 동안 미안했다"

그랬다. 그는 정말 다급했다.


"저는 팀장님이 싫어서 회사 그만둡니다. 팀의 이익 운운하며 직원 진로 막는 팀장님이 너무 싫어요. 그리고 팀원들이 매일 팀장님 눈치보느라 힘들어 하는 건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말 팀장님이 싫어요."

라고 나는 마지막 쓸데없는 말을 씨부렸다.


아들 운동회 때 말고는 여름휴가도 안가는 팀장은 내가 꼴보기 싫어서 나의 마지막 근무 이틀간 휴가를 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나의 솔직함을 후회한 적이 있다. 그딴 솔직한 말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내가 그런다고 그 인간이 변하기나할까? 혹시라도 헤드헌터를 통해 이직이라도 할라치면 이전 직장의 평판이 중요한데 그럼 나는 완전 꽝이다. 선배들이 같이 있을 때나 내편이었지, 깽판치고 나간 내편일리가 있냐...등의 이유로 떠나는 조직에 쓸데없는 입을 놀린 나의 오지랖을 원망했다.


그치만 시간이 더 지나고 지금의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팀원 생활을 했을 때부터 참지 말았어야했다. 부당한 인격모독, 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인사이동을 방해하는 행위 등의 부당함을 참다가 뛰쳐나가는 일이 없었어야했다. 처음부터 그런 되먹지 못한 인격체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뛰쳐나올 거였다면 말이다.

어차피 또라이 취급당할 거였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이팀장, 우리 언제 다시 만나면 지난 날을 추억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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