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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Jun 21. 2024

입장(入場): 친애하는 J 소장님께.

2024년 2월 13일 화요일 C 작가 올림.


첫 번째 편지



친애하는 J 소장님께.

소장님 안녕하세요.
C 작가입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립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단풍 들기 시작할 때 뵈었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 겨울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제도 눈이 제법 내렸습니다. 그래도 한낮엔 0℃에 가까워지는 걸 보면 새해와 함께 천천히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요즘 생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기 때문일까요.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심란하다가도, 이내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하면 마음이 밝아지곤 합니다. 소장님께 요즘 고민하는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말씀드려 보고자 이렇게 편지를 써봅니다.


을지로에 정이 너무 들어버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제가 이곳에 드렸던 시간이 때문일지, 다른 이들이 쌓아 놓은 이야기가 저를 설레어서 일지, 재개발이라는 큰 물리적인 변화 앞에 놓인 이곳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내지 못하는 애틋함이 더 슬퍼지기도 합니다. 예전엔 제가 을지로에 대한 이런 애정을 가지게 될 거라곤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곳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2010년 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을지로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첫 기억입니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싱가게를 운영하시는 외삼촌을 뵈러 온 적이 있었지만 차창을 통해 본 풍경이 어렴풋이 기억이 날 뿐입니다. 이후 성인이 되어 을지로에 다시 왔던 날이 제게 기억되는 첫 을지로였습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찾아와 학우들과 함께 무리 지어 골목을 걸었던 날이 기억납니다.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키네틱아트 수업을 들을 당시, 교수님께서 작업을 위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있다며 산림동에 저희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때 철공소 골목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불행히도 좋지 않은 쪽이었습니다. 날이 무척 더웠습니다. 좁은 골목에 쇠를 갈아내는 소음이 가득했고, 공기는 텁텁했습니다. 신나냄새와 무엇인가 부패하는 듯한 은근한 악취가 코를 찔렀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오겠나." 하지만 그랬던 제가 오늘, 이렇게 계속 을지로를 붙들고 놓지 않고 있다니. 인연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나니 막막했습니다. 넓었던 실기실, 다양한 공구를 사용할 수 있었던 공작실은 더 이상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제게 2015년에 마주했던 을지로는 보물 같은 곳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못 만드는 것이 없고, 심지어 임대료까지 싼 동네가 있다니 무엇인가 시작해 볼 기회를 열어주는 선물 같았습니다. 그렇게 을지로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좁고 구부러진 길을 걸으며 동네를 만났습니다. 한동안은 건물을 만나고, 그 안에 사장님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동물을 만나고, 귀퉁이 핀 꽃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인근에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까지 닿았습니다. 다른 예술가를 하나둘씩 만나며 어떨 땐 그들의 활동이 너무 멋져서 샘이 나기도 했고,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고, 그들의 접근 방식과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도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 동네에 같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귀한 이야기를 같이 엮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졌습니다.


제가 을지로에 자리 잡을 때쯤, 2015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로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습니다. 그 흐름을 만들어가는 한 축에 '어반플레이'가 있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대표가 연희동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도시에도 OS가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걸고 연남동의 이야기를 채집해 매거진을 만들고, 연희동 내에 공예 작업실, 카페 등을 연결해 '연희 걷다'라는 지역 축제를 기획・운영했습니다. 운 좋게도 대표님과 관계가 있던 터라 기획의 과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큰 흐름 속에서 저 역시 을지로에서 발굴한 것들을 도식화하며 후에 이곳에서 일을 벌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나중엔 일을 벌여보고 싶은 마음으로 을지로의 예술가를 만나고 예술공간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결과, 참 다양한 취향을 가진 예술가들이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지역이 공유될 수 있었습니다. 개중 제 취향에 맞는 공간도 있었고, 정 반대 지점에 위치한 공간들도 있었습니다. 살면서 저와 정 반대 위치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을지로에선 그들을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길목에서 서로 다른 취향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가 자신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한 공간에 모여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판을 크고 작게, 형형색색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곳들이 한동네에 있음으로 시민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을지로를 통해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을지로는 대표적인 도심 속 다양한 문화의 창발지였습니다. 이런 현상에 더불어 서울시청, 중구청, 중구문화재단이 정책과 예산이라는 순풍을 더해줬습니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귀하다는 것에 공감하며 각자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공공의 지지와 민간의 다양하고 풍부한 자원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서로에게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전에 없었던 프로젝트 기획 방식, 운영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는 다수의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을지로를 중심으로 민관 가릴 것 없이 촘촘히 연결되어 서로 느슨하게 공명했습니다. 


도시의 구성 요소가 다양하게 있겠지만 저는 그중에서 비 물질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문화에 해당한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게 한 일들은 경험이라는 형식으로 참여자들에게 쌓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태생적인 한계 때문일까요. 다각도로 대외적으로 확산 가능한 자료로 남지 못했고, 정량적인 연구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확산 가능한 자료의 대부분은 을지로에 관해서는 산업군과 원도심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대다수입니다. 다양성을 담보하고, 원도심과 2차 산업 이후에 지역의 빈틈을 채워주는 것이 문화 예술이라는 것을 목격했던 터라 그동안 쌓여온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을지예술센터'가 마무리된 2023년 1월부터 도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예술 공간, 을지로에 벌어지는 예술의 현상을 기록하는 '작은도시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엔 소셜디벨로핑을 하는 회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소장님께서도 흥미를 느끼실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미대를 나온 이 회사는 좀 특이합니다. 테마가 있는 건물을 짓고, 건축물로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커뮤니티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설계하고 운영합니다. 그 결과들이 한 번에 '완벽함'으로 연결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하고 실험하며 데이터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은 건물 중 일부는 공공에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소셜디벨로핑 회사가 건물을 짓고 운영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게 되면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하였습니다. 


을지로의 예술 공간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대응할 카드는 없었습니다. 순응하거나, 계속 맴돌기만 하는 아우성을 치거나, 끊임없이 기록하여 남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욕망의 발현은 지역이 어떤 가치를 가졌느냐와 무관한 다른 층위의 경제 논리로 결정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을지로의 일부는 지역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커뮤니티는 해체되었습니다. 자본지향적인 폭력적인 개발은 1년 넘는 시간 동안 공실 가득한 주상복합이라는 결과로 을지로를 점령했습니다.  어쩌면 '소셜디벨로핑이라는 시행 방식과 을지로에서 쌓아온 이야기를 겹칠 수 있는 시점을 만들 수 있다면 보다 지속적으로 다양한 모습의 삶을 포용하는 도시가 영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올해, 도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취향이 담긴 공간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정리한 데이터를 합쳐보는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소장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 시간을 함께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소장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지향점이 학생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하시는 형태로 발현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저도 그중 일부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그 과정과 결과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의 을지로가 사라지더라도 이곳에 쌓였던 문화적 유전자를 다른 곳에서도 발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이만 이야기를 줄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총총.



2022년 6월 25일 산림동 골목에서 찍은 민들레



2024년 2월 13일 화요일
C 작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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