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서 원석을 찾는 사람
복잡하고, 바쁘고, 요란합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던 생활의 운율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한때는 공장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해가 진 뒤에도 노동자가 일하게 하려고 자극제를 먹이던 시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를 지나, 해질 녘을 잠들 시점으로 여기지 않는 도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분주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생존에 척박했던 한반도의 환경에서 '게으름'은 오래도록 금기였습니다. 게으름은 생존을 위해 결코 해서는 안될 일, 사회에 자신의 생존을 의탁해 기대 살아가는 '무임승차'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 바쁘게 살아갈 때, 직접 생산자가 아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학문과 철학, 예술을 천천히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다시 한번 큰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서서히 자연에서 얻은 볕과 바람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가고, 인공지능과 로봇이 많은 노동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오래, 더 많은 일을 하는 대신, '덜 일하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질문이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게으르게 사색하고, 게으르게 만들고, 게으르게 서로를 지켜보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만든 여유가 필요해지는 때입니다. 조금 더 일찍 게으름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이 만들어줄 가능성을 실험해 온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진 잠재성을 찾기 위해 게으름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느린 리듬을 함께 나누는 게으른 것들의 인큐베이터 lmp작업실. 그곳의 운영자 '베이'를 소개합니다.
목차
베이 이야기
lmp작업실 이야기
기획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베이 이야기
쉽지 않은 질문이에요. 원래 이런 거 잘했는데 지금은 이런 질문이 어렵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획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무엇을 기획하냐고 물으면, 하고 싶은 기획이 너무 많아서 딱 하나를 고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어요.
머릿속에 담긴 많은 기획 중 하나로 게으르지만 뭔가 저지를 인간들이 재밌는 걸 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인 ‘lmp작업실(엘엠피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어요. 또 공예가들과 함께 공예시장에서 기획도 하고 있어요.
아마, 놀라실 수 있어요. 연극학과를 전공했어요. 저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때문에 문창과를 가고 싶었어요.
대학 진학을 앞두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같은 것이 있었어요. 당시 민주 집회 시위들이 다양하게 열렸던 때였어요. 제가 다녔던 계성여자고등학교가 명동성당 안쪽에 위치해 있었어요. 민주화 시위 당시 성당으로 피신한 민주화 운동하는 분들에게 저희 선배님들이 도시락을 싸주곤 했었다고 해요. 학교 밖에서는 여러 집회로 뜨겁고, 학교 안으로는 선배들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419 혁명 때 제일 먼저 깃발을 들었던 중앙대에 너무 가고 싶어 했어요.
당시 서울캠퍼스에 ‘디지털 문예 창작학과’라는 과가 있었어요. 예대가 모여 있는 안성캠퍼스와 교두보의 역할을 하기 위해 서울에 위치했던 학과였어요. 때문에 교수진, 커리큘럼이 모두 같았어요. 중앙대에 가고 싶고, 문예창작을 하고 싶고, 안성은 너무 멀게 느껴져서 지원하게 되었고 합격했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나니 문창과의 서울행이 무산된 거예요. 위로 2개년 정도 선배들이 있고, 동기는 10명이 있었어요. 선배들은 ‘공연영상창작과’라는 곳을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희 글을 쓰고 싶어 학교를 왔던 터라 해당 과가 적절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연극학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연극학과 디지털 문화 창작 전공’이 되었어요.
학과 수업보다는 연극 팀 활동을 열심히 했었어요. 조연출, 무대 감독 보조 같은 것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잘하려면 완전 제너럴 리스트가 되어야 했어요. 의상, 소품 준비부터 음향 편집, 큐시트 준비 등 허드렛일부터 세세한 것들을 다 챙겨야 했어요.
이후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제너럴 리스트가 되어야 했던 시간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여전히 글을 쓰고 싶으세요?
언젠가는 할 일이에요. 때가 올 것 같아 계속 아이디어를 축적해 두고 있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연극팀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전공을 살려 연극계에서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기왕 학과가 통합된 김에 열심히 해보고 싶었어요. 시간이 지나 보니, 예전엔 ‘작가’라는 적성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졸업 후 그냥 집에서 계속 지내며 많은 책을 읽었어요. 그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을 읽게 되었어요. 칠레 국민 시인인 네루다 파블로가 소설에 등장해요. 정치적 망명을 해서 파리에서 살게 되는데, 칠레의 바닷가 마을인 이슬라 네그라 Isla Negra를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걸려요. 그를 위해 마리오라는 우편배달부가 이슬라 네그라 곳곳의 소리를 녹음해서 보내주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렇게 남미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 여행작가 붐이 일고, 수능 대신 세계일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뜰 때였어요. 나도 여행하면서 글을 써보고 독립출판을 해서 책도 내고 했었어요. 하지만, 제게 아무도 연락을 주시지 않더라고요. 당연한 일이 있겠지만. 그래서 생각했어요. 취업을 해야 하는구나.
취업을 위한 아무런 스펙이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붐이었던 스타트업들을 살펴보게 되었어요. 나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 가야겠다. 그러다 반짝반짝한 잡디스크립션이 눈에 들어왔어요. 나를 찾는 것 같은 글이 실렸죠. 그게 ‘클래스101’채용 공고였어요. '착하고, 똑똑하고, 야망 있는 동료를 찾는다'는 공고문이었어요.
지원할 때 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보냈어요. 링크 안엔 이력서, 포트폴리오, 그리고 샘플 온라인 클래스 세 개를 만들어서 상세페이지와 함께 보냈어요. 회사에선 흥미롭게 봐주었고, 이후 과제 전형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스타트업에서 수업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입사 전형을 바꿔버리셨군요. 어떤 일이 시작되었어요?
처음엔 클래스를 만드는 역할이었어요. 크리에이터를 찾는 파트너십 매니저가 따로 계셨어요. 그분이 사람을 찾으시면 제가 클래스를 기획하고 잘 판매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어요. 일을 하는 초반에는 카테고리 구분이 없이 다양한 분야를 맡아서 진행했지만, 이후 리드 분이 오셔서 카테고리를 나눠주셨어요. 제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예를 지정해 주셨어요. 그때부터는 작가를 찾는 것부터 수업을 설계하고 판매하는 것까지 제가 다 하게 되었어요.
다시 제너럴 리스트가 되어야 했네요.
해야 할 일은 많아졌고, 공예에 대한 이해도는 낮았어요. 그래서 제일 잘 팔리는 클래스의 공예작가님을 찾아갔어요. 이야기를 나누고 그 작가님께서 코바늘을 해보라며 키트를 주셨어요. 아주 큰 키트였어요. 처음엔 ‘바쁜데 무슨 코바늘인가’ 싶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주셨으니 해보고 후기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억지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너무 어려워서 바늘은 던지기도 하고 가위로 자르고 했었는데, 서서히 재미가 들린 거예요. 새벽 3, 4시까지 뜨개질을 했어요. 현장에선 ‘개밥 먹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타트업이 자신의 서비스를 체험해 보는 것을 칭해요. 당시에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이 저 말고 거의 없었어요. 뜨개를 시작으로 자수, 위빙 등 다른 공예분야들도 차례차례 직접 배우며 전문성과 이해도를 높이는 시간을 가졌어요. 수업을 직접 듣고, 실습을 해보니 수강생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작가님들과 더 섬세하게 수업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작가님들께서 수업을 만들어오시면 유통했던 역할에서, 수강생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가되셨네요. 회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베이가 이뻤을까요.
처음엔 사비로 수업을 들었는데, 이후엔 60만 원까지 키트 구매 비용을 지원해 줬어요. 복지가 생긴 거죠.
회사의 시스템을 두 번 바꾸셨네요. 입사할 때 전형을 만들고, 직원들이 직접 수업을 들어보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이 가능하게 만드셨네요.
전 그런 사람이었어요(웃음). 그렇게 많은 작가님들을 만나고 수업을 듣다 보니 ‘공예’라는 도메인이 저의 전문성이 되더라고요. 애정도 생겼고요.
시간이 지나 회사의 모습도 달라지고, 제가 지향하는 역할도 회사와 달라지면서 퇴사를 하게 되었어요. 이후로는 공예에 더 집중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공예 작가님들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어요. 작품을 가지고 DIY 키트도 만들고, 온오프라인 클래스도 만들고, 행사도 만들고 등등요.
플랫폼이 되어주실 것 같아요.
작가님들과 이야기하다 한국의 윌리엄모리스 William Morris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기계파괴운동을 했던.
AI가 발전하고 쉽게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사람들은 더 몸을 쓰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귀함을 알아가게 될 것 같아요. 이미 그런 시대가 시작된 것 같고요.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효율적으로 많은 노동이 들어가는 과정도 그렇고, 성취감이라는 것을 대신 만들어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예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아마, 형제들과 함께 자란 경험이 영향이 있었을까 싶어요. 삼 남매로 언니와 남동생이 있어요. 비록 셋이라는 작은 조직이었지만 공동체에 대한 익숙한 경험이 있어요. 조직은 작더라도 그 안에서의 역할이 있어요. 언니는 이끌어주고, 정리하고, 업무를 지시해 줘요. 그만큼 책임도 지고요. 저는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 했어요. 동생이라서, 누나나라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중간 역할을 계속하게 되었어요. 동생은 막내로서 의 역할을 했고요. 성향에 따라, 어떤 역할을 맡아야 된다는 것을 익히며 성장한 것 같아요. 역할을 통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다는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좋은 언니와 동생이 있었네요. 보통은 언니와 많이 싸우는 경험을 하던데, 베이는 어떠셨어요?
아, 그런데 우리 언니는 아주 강력한 물리적인 힘이 있었기에 동생으로서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어요(웃음).
역시 매끄러운 관계를 위해선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한가 봐요(웃음).
역할이라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는 환경에 계속 계셨고, 지금 일을 하면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로.
맞아요. 그런데 그걸 최근까지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요. 무조건 나와 같아야 하고, 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함께 lmp에서 일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느슨하게 같이 해 보자면서 시작이 되었어요. 편했던 사이가 고용관계가 형성되면서 불편해지는 부분이 발생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내가 말하는 만큼 상대방도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향에 따라 정리가 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당시엔 잘 몰랐어요. 말이 없음에 의견이 없다고 판단한 상황들이 아마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들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고 불편함이 유지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고민들이 있었어요. 그런 상황과 생각들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기도 했고요. 돌아보면 다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때 내가 아직도 어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다음에 또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면 다름을 존중하면서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lmp작업실 이야기
lmp는 ‘Lazy, but with Max Potential’의 줄임말이에요. 미국에서 일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베이 너 진짜 Lazy Max Potential이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잠재력이 있고,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나중에 공간을 만들게 된다면 게으르지만 잠재성 가득한 사람들이 응원받을 수 있고,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꾸준한 실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lmp작업실’이라고 이름 지어졌어요.
게으름을 부정하지 않아요. 앞으로는 게을러도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부지런해도 되는 일들은 AI가 해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더 비효율적인 일들에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게으름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가 분명 많을 거예요.
좀 웃길 수 있지만, 다 같이 손에 손 잡고 전 세계 사람들이 조금씩만 게을러지면 모두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경쟁을 하려고 해서 모두가 괴로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게으름이 가진 잠재성을 지지하는 곳. 도시에 너무 필요한 공간 같아요. 어떤 계기로 공간 운영을 시작하시게 된 거예요?
음, 도미노가 넘어가듯? 하게 된 것 같아요. 근원까지 가보면 어릴 적 나만의 공간, 아지트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수동에 ‘깔깔 작업실’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공유 오피스에 입주한 적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좋은 경험을 했어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서로 유대감을 가지고 서로의 동료가 되어주었어요. 서로 다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요. 그 경험 때문에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는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친구에게 찾아갔어요. 제가 항상 일을 저질러 버리는 사람이기에, 브레이크가 되어주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에게 “네가 말려줄 거 같아서 말하는 건데, 공유 작업실을 만들고 싶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가 뜻밖에 너무 했으면 좋겠다고 지지해 줬어요. 자기도 친구 중에 누군가가 그런 걸 꼭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렇게 브레이크가 사라졌고, 엄마에게 보증금을 빌릴 수 있는지를 여쭈니 선뜻 빌려주셨어요. 그렇게 시작해 버렸어요.
처음엔 공유오피스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 공간을 통해 회사라는 거대한 기성의 질서보다 개인들이 모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좋은 공간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었고, 브레이크도 사라지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lmp가 탄생했네요.
성수에서 처럼 커뮤니티 공유 오피스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여러 기획의 사무실이자 문화 공간처럼 쓰이는 것 같아요.
앞으로 lmp에 찾아오시는 분들도 공간이 만들었던 문화, 메시지에 공감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1층 공용테이블에서 회의가 진행된다면, 그것이 내 시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애정과 함께할 여지가 있는 분들이면 좋겠어요.
공간을 운영하면서 있었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으셨을까요?
단순히 공간이 필요해 오신 분들이 계셨어요. 그런 경우엔 공동이 함께 쓰는 공간에 대한 책임감이 부재했어요. 무책임에서 오는 오용이, lmp의 지향에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 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제는 입주자 모집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lmp를 좋아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찾아주시는 일이 종종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공실이 좀 있지만 이 상태로 두고 있어요.
얼마 전, 너무 환영할 입주 예정자들이 찾아왔어요. 웹툰 만화학과 학생 7명이 졸업 전시 준비할 때 쓰고 싶다며 단체로 입주 신청을 한 거예요. 너무 귀여웠어요. 생각해 보니 저랑 14살 차이가 나더라고요. 친구들끼리 규칙을 세워서 왔었어요. 예를 들어 “lmp는 ‘쓰레기 최소화’를 지향하니 우리도 외부 쓰레기를 가져오지 말자.”와 같은 것들이었어요. lmp가 지향하는 가치에 동참해 주는 분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니 기뻤고, 이런 분들이 와준다면 기쁜 맘으로 맞이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수용인원도 정해져 있을까요?
인원수에 대한 제한을 명확히 두지는 않았어요. 공간이 크게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1층은 복층이 연결되어 있고, 2층은 외부 계단으로 연결되어 독립되어 있어요. 공간이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수를 딱 잘라서 정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2층엔 전용석이 다섯 석 있어요. 그리고 자율석이 있어요. 1층 공간을 포함한 작업실 전체를 쓰는 거예요. 1층 공용테이블을 사용해도 좋고, 복층에서 편하게 앉아서 작업을 해도 돼요.
인원으로만 따지면 1층 8명, 2층 4명이니 12명까지 수용이 가능하지만 그렇게는 사용에 불편함이 많아서 5명~9명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획 이야기
비주류에 주목하려 해요. 최근에 ‘게을러서 못 열 뻔한 플리마켓(GMBF)’을 연적이 있어요. 이 플리마켓의 핵심 목표는 비주류 셀러들을 모으는 것이었어요. 원활한 모객을 위해 이미 팬층이 두텁고, 플리마켓 경험이 많은 셀러분들이 와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본 GMBF의 취지와 lmp의 지향을 겹쳐보면 아직 시작하지 않았거나,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새로운 실험을 해보고 싶은 분들과 함께 해야 함이 명확했어요. 취지에 부합하는 분들을 셀러로 초대했어요. 안내에도 그 내용을 명기했고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고 ‘이건 내가 참여할 자리’라고 생각하고 오신 분들이 많았어요. 실제로 그런 분들의 작품이나 판매상품에서 너무 재미있는 발견이 많이 있었어요.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졸업전시만 찾아서 구경 다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소비층을 타깃 해서 홍보를 했고, 실제 그런 분들이 많이 찾아주셨어요.
얼마나 찾아주셨어요?
좁은 골목길로 하루에 약 300명 정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셨어요. 대박이 났죠. 대박이 난 이유 중에 하나는 인플루언서 분이 계셨다는 것도 큰 원인이 되었어요. 한 번도 오프라인으로 작품을 소개해 본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 플리마켓의 취지랑 잘 맞아서 참여해 주셨어요. 덕분에 전체적으로 행사가 성황리에 진행될 수 있었어요.
그런 분들이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게 좋은 기획을 했다는 뜻인 것 같아요. 실험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장이 있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행사들이 운영자 입장에서는 수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니 일반적으로 공공에서 해야 하는 역할인데, 베이가 이 부분을 열어가고 있다는 것이 참 좋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하네요.
맞아요. 돈이 안되지만, 너무 재미있어요. 효용감을 느끼는 지점이 있어요. 많은 곳에서 유명하고 유행하는 것만 보여줄 때, 난 좋은 것을 내가 찾아낸다. 그것이 주는 효용감이 있고, 사람들에게도 lmp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EAT(을지아트트레일) 사무국 회의 때 각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저는 나의 질서로. 나의 세계관으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가득 채운 공간을 만들고 사람을 초대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왜 나면, 질서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공간에 입장하는 분들이 오실 테니깐요.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lmp에서 행사를 열면 저희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와요. 그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즐거워요.
어쩌면 베이의 질서, 세계관, 메시지로 만들어진 공간은 작가의 ‘개인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나중엔 집을 짓거나 마을을 만드실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사실 건축과 도시에 관심이 많아요. 학문적으로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요. EBS 다큐멘터리 중에 ‘건축탐구’를 재밌게 보고 있어요.
lmp를 운영하면서 앞으로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하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인플루언서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하는 일에도 힘이 실리고, 함께 해주시는 분들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꾸준히 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것을 지독하게 못해서.
‘그래서 그랬어’를 운영하는 ‘동구리’는 참 잘해나가더라고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꾸준한 그 능력을 훔쳐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전에 클래스101에서 같은 시기에 일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엔 친분을 만들진 못했어요.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게을러서 못 열뻔한 플리마켓’을 함께 만들었었어요. 입간판도 동구리가 그려줬고, 너무 이뻐서 못 지우고 있어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문구만 바꿔서 쓰지 않을까 싶어요.
참, 인연이라는 것이 신기합니다. 서로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은 결국 다시 만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또 서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어주고요.
더불어, 베이가 '꼭' 인플루언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바춰주고 끌어주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간 이야기
사실, 이 건물을 계약하려고 왔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광희문 성곽 가까이에 있는 다른 건물을 보려고 왔지만 간발의 차이로 다른 분이 공간을 임대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온 김에 좀 더 둘러보다 이 건물을 보게 되었고, 끌린 듯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아마, 처음에 원했던 공간을 임대하게 되었다면 lmp에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은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곳은 단층이었고, 좁은 공간이라 복층, 분리된 2층, 작은 앞마당 등 lmp의 공간 특수성과는 차이가 많은 곳이었어요.
나의 정체성을 담은 공간에 대한 인신 자체는 ‘나의 방’이 생기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삼 남매가 함께 살면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언니와 함께 방을 썼어요. 대학생 때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어요. 엄마가 쓰던 방을 쓰게 되었어요. 엄마는 가득 채워서 사시는 스타일이셨어요. 맥시멀리스트라고 할까요.
어느 날은 방 안에 앉아 있는데, 모든 영감 같은 것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공간을 제 맘대로 꾸밀 마음을 먹었어요. 가구를 다 정리하고 내 나름의 느낌으로 방을 꾸몄어요. 조명도 설치하고, 침구도 사서 깔아놓고. 그때 처음으로 방을 꾸민다는 것, 그것이 주는 충족감을 느꼈었어요.
집을 꾸밀 때 이 집의 어떤 규칙 같은 것, 이 집의 이야기나 컨셉 같은 것에 대해 생각을 많아하더라고요. 방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 공간은 뭘 하는 공간이어서 맞물려 굴러가는지. 이런 생각들을 할 때 너무 즐거웠어요. 각 공간의 역할을 부여하고 서로 맞물려서 운영되는 관계 설정이 lmp를 만들 때도 연결된 것 같아요.
베이라는 사람은 구조를 설계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빈틈없이 작용하는 하나의 규칙을 짰을 때 거기서 느끼는 희열이 있어요.
참 자유로워 보이는데, 그 안에서도 규칙을 만들고 구성해 나가는 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들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고, 저희 부모님도 아파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으신 뉘앙스로 말씀해주신 적도 있어요. 사실, 저는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더라고요. 마치 남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된 것만 같고.
저는 전세를 알아볼 때도 구축을 위주로 알아봤어요. 전세 사기 같은 사회적인 이슈도 있었지만, 신축건물을 가봤을 때 공간 구조가 제게 좋진 않더라고요. 부동산이라는 것도 결국 주거가 제일 중요한 기능인데, 그 외 본질에서 벗어난 외적인 것들이 화재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요.
지금 lmp가 위치한 공간과 골목이 좋아요. 마침 앞 골목이 넓어서 그곳까지 마당으로 사용할 수 있고, 옆건물 아저씨도 처음엔 무섭게 대하셨지만 지낼수록 따뜻하게 많이 챙겨주세요.
사람의 유동이 많고, 새것과 낡은 것이 함께 있는 을지로, 중구라는 지역성이 베이와 베이가 하는 기획에 잘 맞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사실, 제가 중구에 왔다는 감각 자체가 없었어요. 주소가 을지로로 표기되어 있지만, 큰 생각은 없었어요. 중구문화재단에 ‘고등어(지역 예술가 커뮤니티 담당의 닉네임)’가 ‘동네 친구’라는 모임을 함께 하겠냐고 연락을 줬을 때 너무 재밌겠다 생각을 했었어요. 그렇게 동네 친구가 생기면서 내가 ‘중구’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도 명동성당에 있었고, 계속 지역과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일 이야기
일단, 지속성을 위해 수익모델을 만들려고 해요. 지금 기획하고 있는 것은 외국인 대상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요. 케이팝데몬헌터스가 유행한 이후로 외국인들의 유동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그분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에요.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산타 프로젝트도 기획하고 있어요. lmp 내부 공간과 각종 퍼즐을 활용한 방탈출 게임이에요. 아직 모든 내용이 정리된 것은 아니라 간략한 줄거리만 이야기해드릴게요.
산타가 살해되었어요. 산타 살해 현장에 여러분은 초대받으신 거예요. 하지만 이곳에 산타 시신은 없어요. 그 미스터리를 지금부터 풀어야 해요.
이 세계의 세계관을 간단히 설명하면, 오래된 산타 나라예요. 달팽이 산타, 카피바라 산타 등 다양한 산타가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어요. 그때마다 다른 정책을 펼쳤는데, 어떤 산타는 일도 열심히 하고 엄격한 기준에 들어야 선물을 주는 산타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 살해된 산타는 그런 엄격함을 바꾸고 싶어 했어요. 모두가 편하게 선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산타가 선거 캠프로 lmp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이곳에 있는 보좌관, 정책 담당자 등을 만나며 미스터리를 풀고 답을 얻어야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해볼 기획이네요.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사회적인 메시지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기대됩니다.
사실, 10년 후엔 생각보다 lmp작업실이 나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지만, 작업실 자체의 속성이 크게 자라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예씬에서 생각해 온 시장에 대한 기획들을 펼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일반 회사와는 다른 느슨하게 연결되어서 조직원들이 다른 형태로 일할 수 있는 근무제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땐 혼자 하지 않을 텐데 어떤 조직을 꾸려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지금부터 하고 있어요.
lmp의 서사가 쌓이면 어느 시점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베이에게, 베이가 그분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 같아요.
게으름에서 원석을 찾는 사람
오랜 시간 '게으름'은 '나태함'과 함께 쓰였습니다. 지옥의 형벌까지 상상해 낼 정도로 죄로 여겨졌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게으를 줄 아는 영리함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나태하지 않으면서도 게으를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lmp작업실에서 베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루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지에 따라 게으름은 나태함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키워 나가는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lmp작업실은 그런 가능성을 조용히 받아 적고,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주는 자리처럼 느껴집니다.
베이가 해온 기획들을 떠올려 보면, 반짝이는 것들은 하늘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속에도 숨어 있을지 모르겠가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조금 더 주변을 살피고, 서로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태도로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봅니다.
게으름에서 원석을 찾는 사람, 베이가 앞으로 피워 나갈 싹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하겠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lmp작업실
・베이 instagram : @letsdosomethingbey
・lmp web-site : www.lazymaxpotential.kr
・lmp instagram : @lmp.work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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