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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Mar 29. 2024

미술관이 된 도시

EP.01 남쪽 마을에 싹튼 예술

들어가며.

예술은 사람을 따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때문에 도시에게 예술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에 위치한 을지로는 현재 다양한 예술공간이 자리하고 있으며, 예술활동이 활발한 곳 중 하나입니다. 전시공간 간의 사이를 이동하는데 도보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각기 다른 작은 전시공간들이 도심에 모여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그곳의 다양한 공간들이 하나로 엮여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도시를 어떤 곳으로 만들어 줄까요. 을지로의 틈틈이 예술이 스며든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시간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서울과 예술


언제부턴가 서울엔 한 '장르'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역'이 생겼습니다.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따라 중심지가 달라졌고, 지역과 상징하는 장르의 수는 분화했습니다. 오늘날 예술을 대표하는 장소로 통용되는 곳은 대표적으로 충무로, 대학로, 홍대, 인사동, 문래동 그리고 을지로를 꼽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 일부는 여전히 장르에 해당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곳으로, 일부는 장르의 '상징'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한 장소 중 서울의 역사 속에서 오래된 원도심인 중구의 중앙부를 구성하는 명동, 충무로, 을지로 일대를 하나의 권역(이하 남부)으로 엮어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서울의 원도심이 그렇듯 남부일대는 지난 세기 동안 문화자본이 축적된 곳입니다. 빠르게 변해온 외곽과 달리 도심부는 구조가 존속되었기에 시간의 축적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 되어줍니다.


남부 일대는 600여 년의 시간 동안 각 시대 상이 가장 극명하게 반영되는 곳이었습니다. 사회의 지향점, 문제점이 집약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지역이 예술을 상징하는 곳이 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왔을 것입니다. 이번 편에선 남부에서 시작된 첫 장을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수도의 남쪽 마을 : 남촌

1392년 왕 씨의 나라 고려는 이 씨의 나라 조선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국가는 성리학을 국가 근본 이념으로 삼았고 도읍을 남경으로 옮겼습니다. 개국 이후 세 번째 국왕이 된 태종의 지휘 아래 남경은 본격적으로 한양이라는 새로운 수도로 모습을 갖춰나가게 되었습니다. 종묘, 사직과 궁궐을 마주한 한양 남쪽의 목멱산(현 남산) 북사면엔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가 자리 잡게 됩니다. 백성을 교화해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에서 문자와 문자를 통해 남는 기록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모든 과정이 국가의 사업이었습니다.


주자소 인근에 남부학당이 위치했습니다. 한양엔 5개의 국립 학당이 있었습니다.  10세 이상 입학, 15세 이르러 소학의 공을 이루면 성균관 진학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명문대학교를 가기 위해 거치는 명문고등학교를 가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성균관을 통해 유학자로 길러진 인재는 대과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때문에 명문가를 존속하거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이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남부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유학자들이 터를 잡았습니다. 학자들은 그들의 장기인 문을 기반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노래를 짓고, 풍류를 즐기고, 그림을 그리며 수양했습니다. 오늘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서애 유성룡 대감과 충무공 이순신의 생가터와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음에 국가의 명운에 중요한 일에 영향을 미친 양반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도성대지도 都城大地圖, 1751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 남부 일대 Ⓒ서울역사박물관



가난한 문인들의 마을 : 남산골


시간이 흘러 왕조가 지속될수록 중앙집권이 점점 강화됩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성공을 위해 서울(한양)에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견고해집니다. 주택은 밀집되고,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됩니다. 왕권의 강화, 붕당과 사화를 거치며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 시장경제의 발달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 기득권에 들지 못하는 양반은 점차 경제적으로 몰락해 갑니다. 


유교적 인간 완성을 중시하는 사회 체제가 300년 이상 지속되며 학자 계층이자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은 경제적으로 몰락하더라도 생계와 무관하다는 듯 글만을 가까이하며 살아갑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배경이 된 곳 또한 이 일대입니다.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 '묵정동'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조선은 과거제도를 갖춘 국가이고, 과거의 기준은 학문 역량에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부인의 경제 활동에 기대어 학문에만 몰입해도 등용되지 못했던 이들이 허생의 과거를 그만두고 국가를 좌지우지할 영향력을 갖추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꼈을까요. 마치 우리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며 만족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남산 기슭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거나, 가난한 선비들의 마을이 되어 갑니다. 유학자로 명예를 얻진 못했지만 선비로 재산을 축적하진 못했지만 학자로서 품위를 지키고자 한 이들은 삶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문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서로 교류하며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회현동을 중심으로 남사라는 시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술이 있어 풍족하고 맛도 좋으며
시가 있어 淸風처럼 온화하구나.
열흘 동안 길 떠나는 나를 전송하고도
그래도 빨리 떠난다며 한스럽게 여겼네.
한평생 마음에 맞은 사람들
모조리 남촌에서 살고 있구나.

녕재 이건창


남사는 그냥 모여서 시를 짓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인지로 시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남촌신석집南村晨夕集'이라는 시집을 통해 보면 총 48명의 24수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참여자들 중엔 지방의 문사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아 회현을 거점으로 살고 있던 소론의 자재들이 함께 어울리다 뜻이 맞음에 따라 모임을 만들고, 그 활동이 활발해지며 지방의 문인들도 함께 참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남부에서의 활동은 그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여러 지역과 문화 소양이 연결되는 교류의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이 남긴 시는 이후 1900년대 중후반 '조야시선朝野詩選'이라는 책으로 발간되며 근대 한국 문학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정선, 수묵 담채, 18c Ⓒ간송미술관

►인왕산 자락에서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저 멀리 목멱산 기슭의 남촌이 보입니다.



신문물의 교두보 : 진고개, 혼마치

근대부터 진고개(현 명동) 일대는 '외국식', '서양식', '신식'이 자리 잡는 곳이 되었습니다. 1897년, 왕은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궁 인근엔 공사관이 밀집하며 당시 앞선 과학문명을 가졌던 서구의 기술문명이 유입되는 창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경운궁의 남동면 남산 기슭에 당시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언덕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진고개라 불렸습니다.  이 일대에 일본 공사관이 생기며 일본인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진흙 언덕 위에 자신의 마을을 만들어 점점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1905년, 일제로 인해 외교권을 상실한 이후 모든 공사관이 철수합니다. 다양한 서구 국가들에게서 유입되었던 새로운 지식과 세계관은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유입되게 됩니다. 일본인은 한반도에 새롭고 유일한 세력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후 그들에 의해 도시가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고개는 혼마치本町가 됩니다. 신문물과 전통이 함께 충돌하고 소통하는 문화 교류의 장이 생겨납니다. 


1936년, 일본인 전용 극장인 메이지좌(현 명동예술극장)가 생깁니다. 연극과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 탄생합니다. 문학인, 연극인, 미술인이 모이는 장소에 촬영이라는 신기술이 더해지며 종합 예술로 불리는 영화산업이 싹을 틔웁니다. 지배층의 향유물이었던 메이지좌는 당시 대중들에게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대중음악 '오빠는 풍각쟁이'에도 등장합니다.


현 명동예술극장 전경, 1937년(좌) 2000년(중) 2019(우)



교류, 충돌의 현장 : 명동


1945년, 광복을 맞이합니다. 다시 이 땅의 주인이 다시 한민족이 되면서 흩어졌던 민족이 다시 모여듭니다. 혼마치本町는 옛 명례방의 이름을 따 명동明洞이라는 이름이 지어집니다. 되찾은 이름으로 명동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터를 내어줍니다. 새로움과 옛것이 충돌하고, 미학이 충돌합니다.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명동의 다방과 주점에 모였습니다. 치열하게 교류하는 낭만의 시대를 열어가는 지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구 예술이 강점기 동안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고, 그 환경에서 자라난 예술가들은 예술이 있기 이전처럼 여전히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각지에서 모여든 소설가, 시인, 작곡가, 화가, 조각가, 연기자 등 예술가들이 모여 멋으로 무장한채 술잔을 기울이며 치열하게 예술에 대해 논했습니다.


또 누구는 말하기를 술의 중량(重量)과 싸우는 것은 인생의 중량과 싸우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하였다.
귀국한 동포, 항일 독립투사, 망명객, 장사꾼 형형색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종로 거리의 정치적 색채와는 달리 문화적 색채가 농후한 게 특색이었다.

그리운 명동 20년, 이봉구


서로 연대하고, 비평하며 쌓인 이야기들은 남촌에서 명동으로 흘러왔습니다. 이후 남부 문화의 물줄기는 충무로 영화와 대학로의 연극, 인사동의 미술로 흘러갑니다.






참고자료

연구

도성대지도, 서울역사박물관, 2020

조선말기의 문예그룹 南社와 南社同人의 문학활동, 안대회, 2017


단행본

허생전, 안암 박지원, 17c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 이봉구,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사진

도성대지도, 1751, 서울역사박물관

필운대상춘, 정선, 18c, 간송미술관

일본인 영화관 메이지자(현 명동예술극장)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1937

대한투자금융 전경,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2000

명동예술극장 전경,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2019


영상

오빠는 풍각쟁이야, 박향림, 1938,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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