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스 출판/쓸모없는 수학(전자책) 출간 알림
저는 수학 교사입니다. 입시 학원에서 수학 강사로 일했던 시절도 있습니다만, 입시 성적만을 위해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제가 바라왔던 꿈은 아니었기에 결국 교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교사가 되어서도 입시에 허덕일 수밖에 없고, 수학을 가르치고 싶으면서도 문제풀이만을 말해야 하는 것이 작금의 실황이기는 하지요.
도망쳐 도착한 곳에 유토피아는 없다고,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내고 싶은 목소리는 학교 밖에서 모두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입시가 아니라 진짜 교육을 말하고 싶은 어느 젊은 선생님으로서, 학교 밖에서 조용히 쌓고 쌓은 글이 <선생님의 목소리>라는 책이 되었고, 이제는 <쓸모없는 수학>이라는 책이 또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까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쓸모없는 수학>은 수학에 대해 쓴 책입니다.
어쩌면 수학에 '대해' 쓴 책이라는 말은 모순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쓸모없는 수학>에는 수식이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지금은 돌아가신 스티븐 호킹 박사가 <시간의 역사>에서 말하길, 책에 수식이 한 줄 등장할 때마다 판매량이 10퍼센트씩 감소한다는 말이 출판계에 있다고 합니다.
근거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자신의 경험으로도 수긍가는 말이기는 합니다. 수식이 판매량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쓴 과학책이 <엘리건트 유니버스>라지요. 그런 의미로 <쓸모없는 수학>이 수식 때문에 판매량이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독자분과 저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겠습니다.
<쓸모없는 수학>이 수학에 '대해'서 쓴 책이 아니라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은 '쓸모'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쓸모 있어서 아끼고, 벚꽃이 쓸모 있어서 반기는 것이 아니듯, 수학도 쓸모 있어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입니다.
입시에, 성적에, 로켓 공학에, 지능발달에, 필즈상 수상에, '쓸모'에 수학이 있지 아니하며, 그 쓸모의 이면에 수학이 있다고 생각하여 쓴 글이 <쓸모없는 수학>입니다. '쓸모'가 없어진 수학이 진짜 수학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수식을 적지 않고 수학을 썼습니다. 수학에 '대한' 이야기 말고, 수학 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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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이러한 저의 포부와는 관계없이 돌아가는 것이 또 세상이기도 하지요. 언젠가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를, 제가 마음을 두고 있는 '수학 + 교육'이라는 분야는 참으로 가성비가 낮은 곳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육'에 무척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입시와 출세에 닿아있죠. 학령기 자녀를 가르치는 교육서들 중에 '성적'과 '시험'이란 단어가 없이, 또는 무관하게 쓰인 책을 저는 서점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수학'도 그렇지요. 특히나 '수학 교육'이 아닌, 그저 수학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나 수학을 잘하고 싶고, 잘하는 사람을 멋지게 보겠으나 정작 우리 각자는 수학 공부를 싫어하지요. 종종 취미 삼아 수학 문제집을 푼다는 사람은 소문으로 들었으나, '문제풀이'와는 관계없이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을 저는 주변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편의점 매대에 '교육'과 '수학'이 있었다면, 곧장 다른 제품으로 교체되었을 겁니다. 아마 그 자리엔 '입시'와 '성적'이 들어갔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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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저조차도 자신 없어했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어보자 선뜻 손 내민 출판사가 '마누스'입니다. 덕분에 <선생님의 목소리>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죠. 어제도 서점의 에세이 코너 매대에 있는 이 녀석을 보고 왔더랬지요. 손웅정 선생님과 법정 스님의 책과 나란히 있는 모습에, 참 벅차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마누스'는 <쓸모없는 수학>에도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쓸모없는 수학>에는 제가 독자분들에게 이리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혹시 '가장 좋아하는 수학책'이 무엇이냐고요. 그렇다면 '가장 좋아하는 책' 중에는 그 수학책이 포함되냐고요. 이렇게 물은 이유는 저 자신이 선뜻 누군가에게 수학책을 권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선뜻, 저에 대한 일종의 신뢰... 만으로 수학책마저 내어보자 권유해 준 출판사에 감사할 수밖에요. 출판사를 자신의 책 내는 '쓸모'로 생각하는 작가도, 작가를 책 만들어주는 '쓸모'로 생각하는 출판사도 있다던데. 마누스와 저는 아마 그런 면에서 참 '쓸모없음'을 사랑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이런 마누스 출판사를 떠올리면 종종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라는 뜻이죠. 제갈공명이 자신을 종종 비교했다는, 아주 유명한 재상이자 전략가로 유명한 그 '관중'입니다.
그렇게 탁월한 기량을 가진 관중도 젊은 시절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돈을 빌려 갚지 않거나, 허름한 장사마저도 수완이 변변치 못해 친구들이 수습해주어야 했죠. 전쟁터에 나가서는 꽁지 빠져라 도망부터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점차 관중 주변엔 친구가 하나 둘 사라졌고, 그 와중에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가 '포숙아'라는 사람이죠.
주변 사람들이 되려 포숙아를 질타하며 말했답니다. "저, 저 관중 놈이 뭐가 그렇게 이쁘다고 잘해주냐"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자 포숙아는 말했습니다.
"관중 저놈이 지금은 별 볼일 없겠지만, 어디 한 번 두고 보시오. 저 친구 집이 뼈 빠지게 가난하여 돈을 꾼 것이고, 자기 죽고 나면 혼자 남을 노모 생각에 전쟁터에서도 도망쳐 다닌 것이오. 관중은 자기 그릇에 맞는 일을 아직 못 찾았을 뿐이오."
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관중과 포숙아는 각자가 모시던 왕자를 위해 왕위쟁탈전을 벌였고, 포숙아 또한 만만찮은 지혜를 부려 관중은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왕이 된, 며칠 전만 해도 화살로 쏴 죽이려 했던 포숙아의 주군에 의해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합니다.
왕은 자신에게 화살을 쏴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가게 하였던 그 관중의 목을 베려합니다. 그때 포숙아가 나서서 말리죠. 관중을 살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포숙아 자신도 어느 정도는 능력이 있어 이 조그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이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포숙아를 신뢰한 것인지, 마음이 넓은 것인지. 왕은 관중을 놓아줌과 동시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재상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렇게 재상이 된 관중이 포숙아를 돌이켜 이리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라고요. 그렇게 훗날 관중은 제갈공명의 롤모델이 되지요.
흔히 '관포지교'라 함은 관중과 포숙아 사이의 끈끈한 관계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고사를 알고 나면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지요. 물론 끈끈한 우정이 둘 사이에 있으나, 아무래도 관중을 기다려주고, 자신의 영광까지도 내어준 포숙아에 저는 마음이 더 쓰입니다. 저에겐 저를 알아준 사람이 '마누스'와 같습니다.
저는 출판사가 영화의 감독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선 좋은 각본과 배우, 스태프가 있어야겠으나, 이들의 호흡을 이끌고 조화시켜 능력이 빛을 발하게 지휘할 감독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영화라는 오케스트라를 전두지휘할 감독이요.
감독이 없이는 영화가 산으로 갑니다. 'OO영화 제작진!'처럼 제작진만 내세운 영화 치고, OO영화처럼 잘 만들어진 영화는 드뭅니다. 흥행배우라는 말이 있으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흥행을 못한 작품은 기억에 남지 못해 흥행작만 알게 된 탓이지요.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라면 내용이 아무리 어렵든 일단 보고 따져보기도 하죠. 그만큼 감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독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출판사도 그러하고요. 가장 구석에, 가장 낮은 곳에 새겨진 마누스 출판사의 로고에서 무한한 감사와 겸손을 저는 느낍니다. (수학하는 사람이 '무한' 운운하면 진심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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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책'이라는 높은 장벽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종이책으로는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지만, 전자책으로 다시 <쓸모없는 수학>을 볼 수 있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태블릿이 보편화되어, 이전처럼 꼭 리더기를 쓰지 않고도 편히 전자책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독자님들과 저 모두에게요. 하하.
'마누스' 출판사는 에세이를 전문으로 합니다. 그만큼 <쓸모없는 수학>은 수학책이기보다 에세이에 훨씬 가깝습니다. 에세이의 형태로 쓴 이유는 단순합니다. 에세이만큼 자신에 대해 투명히 보여줄 수 있는 장르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겉모습이 아니라, 수식과 성적과 입시와 문제풀이 같은 '쓸모'가 아니라, 그 속의 '쓸모없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필연적으로 에세이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수학>은 에세이입니다.
모쪼록,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학책'에 <쓸모없는 수학>이 꼽히기를 바라봅니다. 조금 더 욕심내자면,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책'에 <쓸모없는 수학>이 꼽히기를 바라봅니다.
책장에 수학책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