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 영화 보기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바다 한복판에서 일어난 여객선 폭발 사고. 사고가 일어나기 전 여객선 주변엔 다른 선박이 없었다. 폭발물이 설치되었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폭발 사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도 "상식적이지 않은 사건이네요..."라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는 찰나.
TV가 꺼진다. 검은 화면. 그 위로 흘러나오는 멋있는 목소리.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 '유카와'. 그는 젊고, 이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똑똑하고, 패션감각 좋은 일류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다. 심지어 손도 이쁘다. 손이 이쁜지는 어떻게 아냐고? 그 이쁜 손을 클로즈업하여 여객선 폭발 사건을 재현하는 물리 실험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
... 영화...?
그렇다. 아이들 학력 증진을 위해, 양질의 수업을 위해 사용하라며 나라에서 비싼 돈 들여 교실마다 달아준 고급 빔프로젝터와 대형 화이트보드. 나는 이걸 오늘 아이들과 영화 한 편 보는 데 사용할 것이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이쯤 하여 "신성한 교실에서 영화라니!"라던가 "영화 보는 것도 수업이냐!"를 외칠 분이 어딘가 분명 있음 직하지만, 이런 비판에 아랑곳 않고 아이들과 나는 어둠 속에 숨어 두 시간 내내 영화를 꼼꼼히 볼 것이다. 아주 꼼꼼히.
-
불 꺼진 교실과 그 중심에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 그리고 빔프로젝터로 밝혀진 화이트보드.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영화가 시작될 텐데도 나는 아이들의 기대에 역행하여 화이트보드에 투영된 영상을 꾸역꾸역 비집고 선다. 그리고 어둠 속 희미한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젊고, 이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똑똑하고, 인기 많은 과학자. 한 명은 이 모든 면에서 반대인 천재 수학자.
사실 수학자는 아닙니다. 수학자가 되지 못한 수학 선생님이죠. 제 자기소개는 아니고요. 저는 천재가 못 되니까요. 하하하.
여하튼,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볼 겁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닙니다. 영화 시작 10분 안에 이 모든 내용이 어차피 나올 거니까요.
이 수학자는 어느 날 옆집에 사는 모녀-엄마와 딸이라는 의미입니다-가 어쩌다 사람을 한 명 죽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녀의 살인을 덮어주기 위해 알리바이를 꾸며주죠. 그런데 이 알리바이가 워낙 완벽하다 보니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이 골치가 아픈 거예요.
왜? 아무리 봐도 이 모녀가 분명 살인을 한 거 같은데, 증거가 없거든. 너무 완벽하게도 말이죠. 그래서 이 사건 수사에 도움을 줄 고문-사람 괴롭히는 고문이 아니라 '조언'이라는 의미입니다-을 초빙합니다. 그 고문이 이 과학자예요. 셜록 홈즈 같은 사람이죠.
여기까지가 주요 배경 설명입니다. 영화 보기도 아까운 시간에 이걸 왜 설명하냐고요? 이럴까봐 설명하는 겁니다. 하하하.
여러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지켜줘야 할 유의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영화 러닝타임 두 시간 동안 절대, 절대, 절대! 대체 어떻게 수학자가 알리바이를 꾸몄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어차피 영화 막바지에 다~ 나와요. 걱정 마세요. 친절히 영화에서 알려줄 테니까.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보려고 노력할 부분은 친절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건 바로 '과학'과 '수학'이라는 세계관의 차이지요. 과학자와 수학자가 얼마나 다른지. 생김새, 입는 곳, 사는 곳, 그리고 세상을 보는 방식. 이 모든 것이 어찌나 다르게 묘사되는지. 어떻게 두 인물을 통해 묘사하는지. 그걸 보아야 합니다.
그걸 볼 수 있어야! 수학하는 사람의 세계관! 그 감성을 따라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수학 공부 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감성을...
말이 너무 길었네요. 여하튼, 알리바이보다 인물 묘사에 초점을 맞춰서 보시라, 이 말입니다. 하하. 얼른 영화 시작합시다. 영화 제목은 '용의자 x의 헌신'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
여기서 잠깐!
자자, 독자분들.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잠시 글은 접어주셔도 좋으니, 뒤에 올 글을 읽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분들도 영화를 보고 오시기를 권장드립니다. 아니, 권장이라기보다는 부탁이랄까요.
원작 책을 읽으셨다고요? 영화를 꼭 봐야 하냐고요?
-
에헤이, 아직도 안 보고 오셨지요? 돌아가셔요 얼른. 영화부터 보고 오셔요, 얼른.
-
이전에 보셨던 분들은 통과입니다! 하하. 예습은 언제나 환영이지요. 자아, 그럼 이어서 읽어볼까요?
-
마지막 10분, 20분을 위해 전체를 보아야 하는 영화 더럿 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은 유독 그런 편이다. '그녀'가 그렇고,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 그렇고,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렇다.
영화의 막바지 30분 즈음. 수학 선생님 '이시가미'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비좁은 구치소의 밤. 코 골며 곯아떨어진 온갖 사람들의 끄트머리에서 담요 한 장 덮고 누운 그는 구치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시가미의 눈에 들어온 천장의 여러 점박이 얼룩들. 그 점들을 잇는 하얀 선들이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려진 선들 사이로 만들어진 여러 기하적인 도형들. 그리고 도형들을 채워가는 색들.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색으로 점차 뻗어나가는 색칠하기. 담요를 덮고 누운 이시가미의 눈에는 구치소 천장에서 '4색 문제'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
"헤엑! 감옥에서까지?"
-
영화의 막바지 15분 즈음. 이시가미는 오랏줄에 묶여 감옥으로 이송되는 중이다. 햇살이 가득 채워진 경시청 복도를 지나는 동안 배경으로 이시가미가 '야스코'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이시가미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어지는 이시가미의 회상장면.
그는 어느 마음의 고독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듯하다. 더운 여름날 자신의 집에서 바삭한 하얀 셔츠를 입고 의자에 올라 천장에 올가미를 튼튼히 걸고 있다. 몇 번 올가미를 당겨보더니 결심한 듯 눈을 감고 단단해진 고리를 목에 건다.
마치 영화처럼 하필 그 순간 울리는 초인종. 이시가미는 주섬주섬 현관문을 열어본다.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을 배경으로 두 명이 보인다. 옆집으로 이사 온 야스코와 그녀의 딸 '미사토'. 막 이사 왔다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밝게 웃는다. 이시가미는 어벙한 표정이다.
그리하여 어찌어찌 살아버린 이시가미는 후로도 이 모녀를 몇 번 마주치게 된다. 그때마다 보여준 모녀의 밝은 인사. 그것으로 이시가미는 구원을 얻었나 보다. 그는 말하길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야스코 씨, 미사토 씨.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이시가미의 독백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
"저게 다야? 저거 때문에 대신 감옥에 간다고?"
-
영화의 막바지 10분 즈음. 이시가미의 헌신의 내막을 알게 된 '야스코'는 감옥으로 후송되기 직전의 이시가미를 찾아와서는 '자신도 같이 벌을 받겠다'며 통곡을 한다.
그녀를 보는 이시가미와 그의 오랏줄을 붙든 주변의 형사 및 경찰들. 그리고 이 장면을 보는 아이들의 소리.
"아!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저러면 다 들키잖아!"
-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그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사실 초반부 10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각한다. 여객선 폭발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유카와에게 형사가 묻는다.
"교수님은 과학으로 증명 안 되는 일은 전혀 이해 못 하죠?"
"그런 게 있나?"
"예를 들면 '사랑(愛)' 같은 거요."
"확실히 그건 비논리적인 것의 상징이지. '밑변 x 높이 = 사랑'이라던가 '반지름 x 반지름 x 파이 = 사랑' 같은 건..."
"아무도 못 풀죠 그런 건! 됐어요, 시간낭비였네요."
"알았으면 됐네."
과학자에게 사랑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 비논리성의 근거란 '실험'을 통한 증명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재생 가능'한 것에만 관심을 비춘다. '실험'이란 특정 환경에서 '재생 가능함'을 담보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그럴듯한 수식과 논리로 무장한 이론일지라도 실험을 통해 현상을 재생해내지 못한다면 실험을 통해 '검증', 즉 실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이란 두 가지를 함의한다. 우선 인위적으로 통제된 실험이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든 '예상' 가능하며, 따라서 '반복'이 가능함을 내포한다. 그것이 '재생(Replay)'의 문자 그대로의 뜻이다.
이 외에도 재생가능성은 '관측 가능' 또한 내포하고 있다. 초음파든 적외선이든, 눈으로든 코로든 귀로든, 당최 관측이 되지 않는다면 이게 '재생'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어떻게 알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측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결국 유카와는 이시가미의 범행을 '증명'하지 못했다. 사랑은 재생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에서 사랑이란 '비논리적'인 것의 상징이다. 스스로도 인정했지 않은가. 사랑을 증명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
수학은 그렇지 않다. 넓은 연구실, 비싼 실험 장비.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대차 없다. 충분한 연필과 종이, 메모장이면 족하다. 어쩌면 책걸상과 연필깎이 정도가 더 필요할까...? 수학에서도 여러 실험이 이루어지지만 그건 다분히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뮬레이션이다. 실제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수학을 한다는 사람이 뭘 연구하냐에 대해 뾰족하게 답하기가 묘연하다. 뭔가 종이와 칠판에 그득그득 수식을 휘갈기며 적어놓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학은 그 분야에 대해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실험 장면을 흘끗 보면 직감적으로 무얼 연구하는지 알 수 있다. 천문 관측을 한다던가 유전자에 대해 연구한다던가 화학 물질로 신소재를 만든다던가 등등.
어찌하여 묘연할까? 명확한 답이 그렇듯, 나는 이 답이 문제 안에 이미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수학은 묘연한 것을 공부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수학의 노력이라 그렇다. 수학의 관심 대상은 '묘연'하다. 현실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숫자 '1'이 대체 어디 있던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숫하게 써온 그 숫자를 단 하나라도 눈앞에 떡 하니 “여기 있소!” 하고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없다. 그런 건 없다. 없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실험할 수도 없다. 수학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것으로 남는 이유다.
-
누구나 간단하게나마 자기소개를 할 순간이 의외로 자주 찾아온다.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는 자리면 더욱 그렇다. 특히 주기적으로 사람을 처음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미용실을 특정해놓지 않고 되는대로 아무에게나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면 더더더욱 그렇다.
미용실을 가면 으레 미용사분이 적적하여(또는 어색함을 벗어나고자) 형식적인 질문을 곧잘 하는 것이다. "무슨 일 하세요?" 같은. 그럼 나는 "아, 선생님입니다."라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 선생님이세요? 중학교? 고등학교?" 하는 반응이 으레 따라오고, "고등학교입니다."라 하면?
"무슨 과목 가르치세요?"
"수학 선생님이에요."
...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미용사 분은 자신이 언제부터, 얼마나, 어쩌다, 언제까지 수학을 싫어할 것인지를 자세히 알려주기 시작한다. 머리가 짧아서 다행이다. 머리가 길거나 펌처럼 오래 걸리는 시술을 받았으면 어찌 될 뻔했는지.
이런 일을 처음 겪을 적에는 상당히 무례하다 여겼으나 지금은 하도 이런 일을 많이 겪으니 익숙하다. 오히려 "저 수학 되게 좋아했어요!" 같은 말을 가아아아아끔씩 듣게 되면 수학 선생님인 나조차 그 발언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대한민국 수학교육이 가고 있는 방향을 알고 싶다면,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저 수학 선생님입니다~'라 소개해보자.
-
분명 선생님보다 '문제'를 잘 푸는 아이들이 있다. 종종. 두뇌 회전이 빠를 수도 있고 어디선가 최적의 '기술'을 배워 풀 수도 있다. 게다가 100점 만점이 정해져 있는 시험으로 실력을 측정하는 제도에서는 선생님이 받은 100점이나 학생이 받은 100점이나 같은 가치로 매겨진다.
하지만 시험 점수가 같다고 하여 수준이 같은가? 이건 분명히 결이 다른 '문제'다. 수학자의 고독을 이해하는 사람과, 대체 왜 저런 일을 하는지 이해 못 할 사람의 수학 수준은 명백히 다른 일이다. 심지어 후자의 시험 성적이 높다 할지라도 말이다. 수학하는 사람을 공감하지 못하는 수학 점수가 대체 무어에 쓸모 있겠나. 영화 속 주인공의 입장 하나 이해 할 수 없다면 말이다.
수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어 문법, 단어, 숙어 줄줄 외워 무엇하겠는가? 그것으로 지어낸 문장이 가볍디 가볍고, 읽어낼 수 있는 깊이가 얕다면 말이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속 시어를 족족 뜯어내고 상징으로 분석하여 '문학' 점수를 높이 받으면 무엇하겠는가? 윤동주가 그 시를 '대체 왜' 썼는지, '왜 하필' 그 시였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면 말이다.
그 '쓸모'와 '무엇'에 '대학'과 '취직'이라는 답변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요즘이다. '현실'이 삶의 왕좌를 차지한 듯하다.
-
어둠 속에서 이시가미의 절규와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섞어 듣던 나는 심란했다. 이시가미는 고독 속에서 사랑을 보았는데, 아이들은 결국 범죄의 줄거리만을 보게 되었다.
-
'사랑 애(愛)' 자는 사람이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걷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보고 가슴이 저려와 '크... 크읏!' 가슴을 움켜쥐는 익숙한 장면.
그런데 우리는 슬픈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두고 '가슴 아프다'라 표현하기도 한다. 슬퍼 가슴 아플 때, 그때도 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걷는다. 실제 슬프고 힘들 때 가슴이 더 저려오기도 하고.
섬세한 감수성은 과도한 낭만도 아니고 과도한 현실주의도 아닌, 그 사이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능력이다.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과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동등하게 부당하다면 그 사이 자유로운 상태를 추구함이 당연하듯이.
아이들의 감수성이 꼭 그러했으면 좋겠다.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하는 감성. 기쁘고 웃기고 왁자지껄하고 활발한 것만 좋아하지 않고, 슬프고 우울하고 차분하고 정숙한 것의 아름다움도 아는 감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련된 감성.
손으로 풀어낸 문제의 오답률만이 공부가 아닌, 그 손이 달린 몸과 몸 속에 담긴 심장과 머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낭만까지 공부로 여기는 감성. 그리하여 '열심(熱心)'이란 말에 걸맞게 '가슴(心)에서 열(熱)'이 식지 않는 공부.
졸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 갈' 인생을 위해 식지 않을 감성. 그런 아이들이 되면 좋겠다.
-
-
사족. 영화 도입부. 유키와는 ‘가우스 가속 장치’를 이용해 여객선 폭발사건을 재연한다. ‘가우스’는 수학자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