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얼린 버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하늘 Sep 05. 2023

머리를 기를 수 있을까

미완을 견디는 일




작년 10월,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 뒤로 머리가 자라 어깨에 닿을 것 같으면 턱끝 언저리로 바짝 잘랐다. 단발의 좋은 점은 가볍고 머리가 빨리 마른다. 성격이 급해서 드라이기를 들고 오래 못 있겠다. 요즘같이 더운 날일수록 성격이 더 더러워지기 전에 머리를 어서 잘라야 했다. 흔히 거지존이라 불리는 애매한 길이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미용실에 갔다.



샴푸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물에 젖은 머리카락처럼 마음이 훅 무거워졌다. 사실 이번에는 머리를 기르려고 했는데  참지 못하고 또 이렇게 잘라버리는구나 싶어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난 정말 중간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서글퍼지기도 했다.


모 아니면 도

일등 아니면 꼴등

튀지 못하면 짜져 있기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도 안 하기

불도저처럼 화끈하게, 여드름을 짤 때처럼 집요하게 끝장을 보기도 하지만 미완을 견디는 일은 잘하지 못한다.



사실 머리는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요즘 내 삶을 반짝이게 해 주던 글쓰기와 운동에 권태를 느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내가 대단해 보여서 신이 났고 열심히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너무 좋아서 평생습관으로 만들기로 다짐했지만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렸다. 시작만 요란한 나에게 실망했다. 더군다나 더우면 입맛이 없다는데 요새 입맛이 너무 돌아서 미치겠다.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좋으니깐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글 쓸 시간이 줄어들고 먹으면 퍼져서 운동이 가기 싫다. 침대에서 책상까지 고작 두 발작이면 되고 헬스장은 10분이면 가는데 몸이 무거워서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이 무거워서 마음이 무거운 건지 마음이 무거워서 몸이 무거운 건지 생각하기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래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듯 이 악순환의 연결고리도 끊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결심했다. 잘린 머리카락을 다시 붙일 수 없듯이 지난날은 잊고 산뜻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가벼워진 머리처럼 발걸음도 가볍게 미용실을 나섰다.



프로필 사진 속 길고 꼬부랑거리는 머리는 무심코 기른 머리였다. 집게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게 유행이라 형형색색의 집게핀을 골라 묶다 보니 어느새 머리는 자라 있었다. 머리를 기르는 일도 기르려고 마음을 먹으면 되게 더디게 느껴진다. 묶어버리고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어느 정도의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앞으로 앞 길이 구만리인 나에게 이 정도의 멈춤은 길게 보면 티도 안 날 것이다. 머리가 자라듯이 나의 의욕도 언젠가는 다시 솟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열심히 하면 된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발의 장점만 보고 과감하게 머리를 자른 것처럼 내가 선택한 일과 현재의 나의 상황에 대해서 좋은 점을 더 많이 봐야겠다.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머리가 아팠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행복을 선택한 거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자.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거의 없다.      



요새 친구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다. 맨날 맛집을 찾아다니기 바빠서 비록 바지는 쬐어가지만 그러면 여유로운 원피스를 입으면 된다. 친구와 보냈던 시간이 행복하다면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 행복을 오롯이 느끼자.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영영 기억될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다.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는 나니까 이 어중간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지금을 즐기자.



고개를 돌릴 때마다 턱끝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다. 머리를 자른 날에 이 마음을 잠깐 기록해두었다. 미루고 미루다 3주가 지난 지금에야 글을 쓰는 나지만 그래도 해낸 내가 참 기특하다! 그렇다면 머리도 언젠가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르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걸어 다니는 초코송이 씀-


매거진의 이전글 하마터면 나를 잃을 뻔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