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름 단상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는데 그때 이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많이 깨졌다.
우선 우리 가족이 충격을 받은 사례 하나가 있다. 영국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그 애가 우리 엄마를 이름으로 불렀다! Eun-Suk! 아니, 자기 엄마도 아니고 남의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근데 생각해보니 거기는 어머니-라든지, 누구누구의 어머니 이런 호칭이 없다. Mum은 그저 자신의 mum이나 mum인 거고 친구의 mum은 자기 mum이 아니니 mum으로 부를 수는 없는 셈이다! 더더군다나 mother는 더욱 아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에는 어벙 벙했지만 이내 그럴 수 있겠다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우리 가족이 당황한 것은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이름을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은 보통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누구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정의는 어찌 보면 정체성이 결핍된, 빼앗겨가는 사람에게 더 엄격하다. 엄마는 엄마가 되자마자 지윤 엄마, 안사람, 와이프, 새댁 등으로 불리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장 단적인 예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다. 할머니는 평생을 누군가의 누나, 언니, 엄마, 할머니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할머니 이름을 상기시켜주는 사람은 동사무소 직원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자기 할머니 이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칭은 친근감을 주고 우리의 관계를 정의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이름도 얼마나 중요한가. 이름만 부르는 게 무례한 일이 된다는 건 그만큼 정해진 관계 속에서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거다. 영국에서의 친구가 우리 엄마를 지윤 어머니가 아닌 이름으로 부름으로서 허물어지는 벽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서로만큼이나 서로의 엄마와 친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또 가족들끼리도 모두 교류했다. 호칭 차이 하나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어 부르는 방식은 꽤나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해 줬다.
나는 지금도 가끔 엄마를 이름으로 부른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자제하라고 하다가 또 최근에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아빠는 여전히 아빠이긴 하지만 전화번호부에는 엄마랑 똑같이 각자의 이름으로 해두었다. 이렇게 해놓으면 특별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저 29살, 30살에 나를 가지고 아빠, 엄마가 되어버린 존재들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로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분명 관계가 갇히지 않는 면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