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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분홍 Dec 27. 2020

미완성 인생

피아노 색칠하기


집에 디지털피아노가 하나 있다.

동생에게서 산 것이다

그렇다..그 아이는 프로 장터러였던 것이다

한때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피아노(이것의 명칭을 잘 모르겠다. 전자키보드? 디지털 피아노? 전자피아노? 그냥 내 맘대로 가장 있어 보이는 디지털피아노라고 부르기로 한다) 사고팔기를 반복하던 동생이 어느 날 이걸 팔려고 한다기에 나에게 팔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은 진짜로 나에게 팔.았.다..

가족끼리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한다는..것인가

얼마에 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거실 한쪽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디지털피아노


어렸을 때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딱히 가고 싶었던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기에 집에서 학원을 다녔던 유일한 사람은 오빠였다

웅변학원, 주산학원 이런 데를 다녔다

엄마 아빠는 나름 첫째에게 투자를 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크다 보니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이들이 꽤 많다는 것에 내심 놀랐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음악시간에 선생님은 피아노 칠 줄 아는 사람 누구냐고 물어보았고 어떤 아이가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그 아이의 반주에 맞춰 매시간마다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문득 반 아이들의 합창소리를 훨씬 뛰어넘는 퀄리티의 피아노 소리를 의식하고 나서 나는 무척 놀랐다

아니 쟤는 어떻게 저런 걸 할 수 있는 거지?


그 이후로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알고 싶다고 줄곧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청난 열망이라기 보단 그래 죽기 전에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고 싶다..뭐 이 정도?

 말하고 보니 버킷 리스트인가..


하여튼 나에게는 피아노가 생겼고

얼마 안 있어서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학교 앞에 위치한 초등학생 위주의 전형적인 동네 피아노 학원이었다


커버를 벗은 피아노

피아노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대로 나는 소리를 듣는 일은 약간 중독성이 있었다

그리고 건반을 치고 있자면 묘한 집중의 상태에 빠져들어 시간이 훌쩍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동생에게 요새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얘길 꺼냈는데 그 아이가 “맞아요 그거 어렸을 때 맨날 사과 색칠하고 막..”이러는거였다


사과? 사과라니? 사과를 왜 칠하지?

ㅎㅎ

숙제로 몇 번 연습했는지 사과를 칠한다는 거였다

그 순간 너무 칠해보고 싶었다 그 사과..

애플 핸드폰도 그 정도로는 갖고 싶지는 않았건 거 같다


그리고 다음번 수업 때 선생님에게 사과 얘기를 꺼냈다

선생님은 아 그거..이거 해보실래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빈칸을 각종 색연필로 가득 채울 생각에 꿈에 부풀어 진도카드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뒤로 개인적인 일 때문에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고

피아노는 내가 만든 커버에 덮혀(그래도 저 회색 커버는 완성했다) 계속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집을 방문한 친구들이 이거 한번 쳐봐도 돼? 하며 추억에 잠긴 표정들로 약간씩 삐끗해가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아니 저걸 저렇게 바로 친다고?

역시 나만 못 치는 거였던가..피아노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진도카드를 얼마큼 색칠했는지 궁금해하며 열어보았다. 첫 페이지에는 선생님이 친히 적어주신 숙제와 지시사항이 적혀 있었다

다음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아무칠도 안 돼있었다

빠르게 다음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그렇게 몇 장 안 되는 은행통장 같은 진도카드라는것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쳐보았다


뭐야? 아니 내가 색칠을 한 번도 안 했다고?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아니 사실은 많이 없었지만


끝까지 색칠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안 했나 이렇게 다시 한번 정당화시키며

먼지 묻으면 안 되니까 일단 커버를 덮어 놓았다



이번 생이 끝나려면 아직은 조금 더 남았으니까..

다시 피아노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이 글을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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