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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niciel May 14. 2021

01. 신문구독

해지는 우편으로 하세요

#France101


H씨는 프랑스 유학 시절 프랑스어 공부를 할 겸 Le monde 신문을 온라인으로 구독 신청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더 이상 신문을 보고 싶지 않아서 해지를 하려고 했지만 만약 해지를 원한다면 Lettre recommandée (우리나라로 치면 등기우편)를 오프라인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독은 온라인, 해지는 오프라인으로 어렵게! 이미 한국으로 귀국한 H씨는 아무래도 내용증명이라도 보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H씨는 간단하게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그렇게 쉽게 해지를 시켜줄 수는 없지. 당신은 프랑스를 얕본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Cedex라는 주소를 가지고 있는 기업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Cedex는 일종의 사서함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Cedex 주소로는 한국에서 우편을 보낼 수가 없다고 한다. 통상 EMS로는 대부분의 지역에 국제우편을 보낼 수 있는데 EMS로도 이 주소로는 우편을 보낼 수 없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Le monde는 Cedex 주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그 상황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이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기에 이미 이 세상에는 친절하게도 Lettre recommandée를 대행해서 보내주는 서비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H씨는 résilier le monde라고 구글에 검색해보았고 그런 서비스를 찾아내어 우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구독 해지 절차를 진행하려는 순간 H씨는 귀찮아진 나머지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잠깐 포기하였다. 하지만 구독료가 매달 나가므로 언젠가는 다시 시도할 예정이다.




4일 뒤, H씨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Le monde에 이메일을 써보기로 했다. 융통성이라고는 딱히 없는 유럽 사람들에게 이 방법이 그렇게 효과적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행 서비스까지 써가면서 신문 구독해지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그래서 오랜만에 프랑스어로 간단하게 글을 써보았다. 내용은 대략 '내가 이미 한국에 와있는데 이거 참 방법이 없더라 어떻게 하냐~'였다.


이메일을 보내자, 답장이 바로 왔다. 이럴 수가 그렇게 빨리 답장을 할리가 없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자동답변 이메일이었다.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답장은 빨랐다.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H씨는 3일 만에 장문의 아름다운 답장을 받아 볼 수 있었다. Le monde 측으로 이메일을 보낸 날이 주말이었기에 이틀은 쉬는 날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치고는 꽤 빠른 속도의 답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H씨가 받은 이메일은 사실 좋은 비즈니스 이메일의 예시는 아니었다. 보자마자 읽기가 싫어지는 길이와 빼곡한 문단들이 화면에 가득해서 H씨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져 그 화면을 닫아버릴 뻔했다. 그것은 마치 인문대학교의 대학생이 레포트를 써야 하는데 달리 할 말은 없고, 분량은 필요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분량을 늘리고자 필사적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가능한 최대의 길이로 늘려서 적어 놓은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의 표현일 것이다. 아주 정중하게 긴 여러 문장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해지방어'요. '우리의 소중한 구독자님, 정녕 당신께서 해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까?'라는 간절함이었다. 그러면서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고 '우리가 당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겠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알겠습니다. 해지 시켜 드리겠습니다.'는 말도 편지의 끝부분에 잊지 않았다.   


다만 그 제안은 H씨에게만 특별하게 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H씨가 이전에 가입한 프로그램이 폐지 되고 새로 나온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었으며 새로 가입을 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적용되는 가격이기는 하였다.




첫 번째의 기다란 이메일에 그래도 구독을 해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글을 적어 답장을 보낸 H 씨는 불과 몇 시간 만에 하루도 안 걸려 도착한 답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프랑스에서 이렇게 빠른 답장이라니?'


이메일 보내 놓고 최소 하루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빠른 답장에 H씨는 놀랐다. 사실 하루도 빠른 편이기는 하다. 거기다 내용을 보니 그들이 군말 없이 아주 순순히 구독 해지를 해주겠다고 보내왔다.


H씨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 일이 단 두 번의 이메일로 끝나다니 말이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H씨는 이 사람들의 놀라운 일처리 속도에 '혹시 나에게 메일을 보낸 이 담당자는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 없어서 오히려 일이 빨리 해결되면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이곳에서는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빠른 답장과 빠른 일처리라니, 코로나 19는 프랑스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인가? H씨는 감동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잘 마무리되는 건가 싶었지만 어딘가 찜찜하고 불안했던 H씨는 그로부터 3일 뒤에 갑자기 자신의 계좌에서 구독료가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어디 프랑스에서 일이 한 번에 끝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H씨는 곧장 '구독 해지 신청을 했는데 내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갔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하고 이메일을 다시 적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한국 시간으로 저녁 무렵에 그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코로나 19가 프랑스 사람들의 시계를 어느 정도 빠르게 움직이게 만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계좌에서 돈이 나간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일처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구독 등록해놓은 결제수단이 해외 은행에 계좌가 있는 탓에 결제 과정에서 얼마간 시차가 생겼고 그 때문에 해지 요청을 보내기 전에 발행된 계산서가 늦게 넘어갔다고 하는 듯하였다. 해지는 정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하였다.


겨우 몇 천 원을 아끼자고 이 고생이라니, 이제 H씨는 이 문제를 신경 쓰는 일이 귀찮아져서 이만하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하지만 H씨는 역시 프랑스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알려준 구독 만기 일자는 6월 21일. 이 날에 또 결제가 될지도 모른다. 최종 해지 일인 6월 21일은 아직 지나지 않았고, H씨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H씨는 Le Monde와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은 날로부터 10일 뒤에 무사히 구독 해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문제는 없겠지?



* 이 글은 H씨가 구독 해지를 하는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업데이트 되었다.

* H씨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구독 해지를 신청하고 해지되었다고 확인 이메일을 받는 데까지는 대략 10일이 걸렸다.

* 그로부터 13일 뒤에 H씨는 마침내 구독해지가 된 것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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