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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Apr 09. 2024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봄날에 감사하며

프리랜서의 일이란 초콜릿 자르듯이 똑똑 잘려 오지 않는다. 몰아칠 때 한꺼번에 마감이 몰려온다. 쌓여있는 일들을 하루종일 처리 하다 보면 손목부터 어깨, 목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하루 종일 일하며 잠시 숨 돌리는 시간은 아이와 함께 등하교하는 시간이다. 어디 출근할 일이 없으니 아이와 함께 나가지 않으면 아마 몇 날이고 집에만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갈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물론 마감이 바쁠 때는 워킹맘의 비애가 절로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의 우선순위를 가족에게 둔 후로는 아무리 바쁜 마감과 일 더미 속에서도 아이와 남편을 챙기고 돌보는 일에 화가 나지 않게 되었다. 일을 조금 못하더라도, 조금 덜 벌더라도 중요한 것들에 마음을 더 두기로 하였다.


우리 가족이 모여사는 시간들은 찬란하게 피었다 비처럼 내리는 벚꽃처럼 짧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9살이 되고 (물론 한국 나이로 7살이지만, 아이들은 9살이 7살이 된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았는다 ㅎ) 어느새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어 책가방을 매고 씩씩하게 교실로 들어가는 걸 보며 아 이 시절이 길지 않겠구나 싶어 진다. 물론 아직도 아이의 등하굣길에 학원까지 따라다녀야 하지만 아마 이 작은 도시에서 우리가 더 살고 적응하면서 아이가 자라면 금세 혼자서 씩씩하게 돌아다니겠지 싶어졌다.


결혼한 지 벌써 10년인데 온 가족이 같이 산 기간은 5-6년 정도 되는 것 같다. 결혼하고 주말부부도 1년 정도 했었고, 케냐에서 코로나로 인해 오래도록 떨어져 있었고, 해외와 한국을 오가며 지내는 동안 일 년에 3-4달은 따로 지냈으니 말이다. 다 같이 사는 게 가족이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남편은 다시 해외로 나갈 준비 중인데 나와 아이는 당분간은 한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9살이 되기까지 너무 많이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학교를 바꿔가며 다녔더니 아이는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것을 더 힘들어하게 되었다. 고작 같은 학교에서 학년이 바뀌는 것인데도 울고 힘들어하며 새 학기를 보냈다. 선생님과의 상담 끝에 아이가 웬만하면 당분간 이사를 다니지 않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나도 아직 새로운 환경에 아이와 함께 적응하며 불안해하는 아이를 힘써 돌볼 만큼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 머물기로 하였다.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결정에 한몫하였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 출국하는 7월까지 3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같이 지낼 날이 이제 3개월 정도 남은 것이다. 물론 1년 뒤에 내가 같이 나갈지 남편이 들어올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당분간 온 가족이 함께 있지는 못하다니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든다. 특히 아이가 아빠를 너무 좋아하고 같이 지내고 싶어 해서 이 부분도 좀 걱정이긴 하다. 엄마는 늘 숙제하라고 하니 놀아주는 아빠가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날 만나 고생중인 노트북


그래서 일과 삶의 밸런스와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금은 내가 바쁘면 남편이 아이를 돌봐줄 수 있지만, 이제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 하니, 더 삶이 정돈되어야겠다. 특히 어제는 엄청나게 바빴었다. 마감이 두 개에, 하나는 엄청난 양의 번역을 빠른 시간에 마쳐야 했다. 게다가 AI 훈련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게 시간당으로 일하다 보니 한 시간 한 시간이 아쉽다. 더구나 팀에서 바쁘게 일할 때 딱 최소의무량만 하고 빠지는 것도 원래 몸 바쳐 일하는 내 적성에는 아니다. 하지만, 과감하게 번역도 마무리하고 AI트레이닝도 손을 떼고 일어났다.


일 중독자가 아이의 저녁시간을 돌보기 위해서 책상을 떠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꺼지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노트북을 끄고 엉망이 된 거실 식탁을 정리하고 아이의 저녁 식사를 챙긴다. 아이의 가방을 정리하고 알림장을 확인한다. 아이와 몇 시간이고 씨름하며 받아쓰기 연습을 하고 도형에 대해서 알려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엄마와 안고 누워있고 싶다는 아이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아이의 보들보들한 손과 발을 만져본다.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웃고 뒹군다. 이 시간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다. 더 충만히 더 감사히 누려야지 다짐한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메일을 확인해 보았다. 번역 퀄리티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약간 수정만 필요했고 AI트레이닝 일도 나 없이도 잘 끝났다. 또 다른 일들이 들어와 이메일 답장을 쓰고 다시 한번 하루를 정리한다. 매일매일 80% 에너지만 쓰며 사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온 힘을 쓰며 매일 일하고 보내지 않아도, 어깨에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다는 걸 이제 좀 알 것 같다. 최선이라는 것의 정의를 다시 써가는 요즘이다.



사진: UnsplashTOMOKO 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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