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32도쯤은 당연해진 서울의 여름이다. 일요일인 오늘 나는 집에서 지난겨울 나를 따뜻하게 받쳐주던 폭신한 이불보 위에 누워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해지는 온색계열의 여러 가지 패턴 조각보를 이어둔 두터운 이불이다. 동그란 꽃무늬도 있고, 어지러운 페이즐리 문양도 있고, 붉은 땡땡이나 줄무늬도 있다. 주말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여름 내내 겨울 이불을 깔고 있다. 선풍기는 고개를 까딱이며 쉬이이익 소리만 시원한 소음을 내면서 다 데워진 공기를 방안에 굴리고 있다. 직장 동료가 점심을 먹으며 이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지구가 끓는(global boiling) 시대라고 말해준 게 떠오른다.
가만히 누워있는 나를 지치게 하는 건 변온동물 마냥 바깥 기온에 맞춰 쉽게 온도를 올려버리는 내 방이 아니다. 며칠 집을 비운 동안 미쳐 치우지 않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통에서부터 시작해 집을 점령해 버린 날파리들도 아니다. (사실 이 둘이 아니었으면 조금은 덜 지쳤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이렇게나 지치게 하는 것은 하늘과 땅굴을 오가는 내 안의 생각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나는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번갈아 나를 채웠다가 비우기를 반복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이 있다.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의 시기라는 뜻으로 격동적인 감정 변화를 느끼는 청소년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는데 나는 이 시기가 청소년기에 국한된 표현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 시기는 인생에 한 번 볼까 하는 월식이나 엄폐 같은 천문현상보다는 매년 맞을 수 있는 태풍 같은 기후현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나아갈 답을 찾지 못하고 우울의 태풍에 휩쓸리는 시기가 나는 자꾸만 온다. 녹은 떡처럼 가만히 누워서 그 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리고 있다. 어쩌면 이 질문들을 오고 가는 태풍처럼 받아들이는 내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있을 다음을 기약하며 구덩이 같은 이 질문들을 공들인 답으로 메꾸기를 미룬다. 대신 시간이라는 모래알과 변덕이라는 갈대 같은 것들로 구덩이 윗부분을 대충 쉽게 가려버리는 거다. 그러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구덩이 따위는 금세 잊어버리고 나는 일상으로 복귀해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사실은 메워지지 않은 구덩이에 함정마냥 계속 빠지기를 반복할 수밖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지만 나는 여전히 누워있다. 가만히 누워서 피상적인 답을 찾아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써본다. 모든 답이 시작은 그럴듯하다가 결국 벌어먹고 사는 이야기가 되어 금세 무너져버린다.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세상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눈물까지 흘리는 자신을 보며 일말의 의지가 일어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 손바닥으로 양 볼을 밀어 올렸다 쓸어내리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직장인인 나는 이른바 워커홀릭이다. 저녁이나 주말 없이 사무실에 있다. 일을 잘하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일을 하는 행위 그 자체에 만족하고 그 사실에 위안 삼아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낸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를 달며 산다. 한 여름에 겨울 이불을 내내 깔고 지내는 까닭이기도 하고, 부엌 싱크대에 날파리가 꼬인 이유이기도 하다. 빨래 바구니가 넘치다 못해 찢어지고, 네 달은 족히 방치해 둔 작은 방은 발 디딜 틈이 없는 이유다.
*이 문장은 오싹한 문장이다. 스스로의 정신적 위축은 타인의 물리적 감금이나 폭력만큼 위험하다.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서서히 죽어갈지 모른다. 이때에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래 하나씩 처리해 보자. 내 몸통의 두 배 정도 되는 빨래 바구니를 세탁기 앞으로 다섯 걸음을 들어 옮긴다. 흰색과 검은색과 색깔 옷을 구분하면서 빨래를 드럼통 안으로 넣는다. 최대 용량 표시선을 넘기며 꾸역꾸역 밀어 넣었는데도 바구니에는 빨래가 고봉밥처럼 쌓여있다. 면 에코 코스*를 설정해 두고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이번엔 뒤돌아 화장실에 들어선다. 곰팡이 제거제를 벽과 바닥 타일에서부터 세면대, 변기까지 눈이 따가울 만큼 뿌린다. 강력한 락스가 곰팡이를 잠식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다시 나와 세탁기 옆 싱크대에 선다. 빨래를 섞고 있는 세탁기가 온몸을 흔들어댄다. 세탁기 위에 놓인 다기가 서로 부딪히며 종소리를 낸다. 맑은 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구태여 다기를 떼어두지 않고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는 내가 좋아하는 집안일이다. 별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고 나면 더러웠던 식기들이 등을 구부린 채 서로 엎어져 깨끗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물놀이를 한차례 끝내고 해수욕장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평화롭다. 다시 뒤를 돌아 화장실에 들어간다. 한붓그리기로 한 꼭짓점에서부터 직육면체를 그려내듯이 샤워기를 움직인다. 아이보리 색인 줄 알았던 화장실 도기들은 붉은 물때가 빠지며 하얀빛을 찾는다. 허리를 구부려 세면대 아래를 훑는 도중에 입고 있던 회색 티셔츠가 아직 락스가 발린 벽타일에 스쳤다. 염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락스가 닿은 부분이 타들어가듯 티셔츠 주변으로 번진다. 염기반응은 직경 6cm 정도를 새하얗게 달리더니 점차 속도를 줄여 누런 치아 빛을 띠며 1cm 정도를 전진하다가 끝에는 연한 동백꽃 색깔로 변해 0.3cm 정도 두께의 테두리를 남기며 서서히 사라진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지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초신성 폭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초신성이라는 단어는 왠지 거룩한 느낌이 든다. 대단히 특별한 별의 탄생이나 전성기를 뜻하는 말 같다. 하지만 사실은 수명을 다한 별이 종말 하는 마지막 순간이라나. 별은 길고 긴 일생의 맨 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한다.
*면 표준 코스는 2시간이 걸리지만 면 에코 코스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2배 빠른 셈이다. 코스 이름의 ‘에코’는 eco-friendly(친환경적)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economy(절약적)하다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나는 빨리 끝을 내는 것이 좋기 때문에 면 에코 코스를 선호한다.
티셔츠 끝자락을 만지작 거리다 손에 묻은 락스 냄새를 맡으며 몇 달 만에 작은 방에 들어섰다. 방바닥에는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간 건조대에서 다 마른 옷들을 낙엽처럼 바닥에 떨궈내며 지냈기 때문이다. 수건, 속옷, 양말, 잠옷, 겉옷, 웃옷, 아랫도리 등 목적을 가리지 않은 다양한 옷가지들이 계절감에 따라 지층처럼 쌓여있다. 물건이 담기거나 담기지 않은 종이가방과 없어도 전혀 문제없는 서류들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가 사이사이 납작하게 깔려있다. 한 층씩 걷어가면서 기억에 굳이 남겨두지 않았던 지난 6개월의 기억들을 발굴한다.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이라 별다른 감상에 빠질 일 없이 물건들을 제자리에 찾아 옮긴다.* 바닥이 드러나니까 꽤나 두터운 회색 먼지층이 보인다. 구석구석 깔린 먼지를 닦아내면서 도대체 먼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한다. 이 방은 창문도 닫혀있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오염도 거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각질, 옷의 미세 섬유 조각 따위로 이렇게 많은 먼지가 쌓이는 게 가능할까? 청소를 하다 말고 검색을 해본다. 대부분의 먼지는 집진드기의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진드기는 섬유가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3개월 정도의 수명을 사는 동안 자기 체중의 200배에 달하는 배설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일생을 섬유를 갉아먹으면서 배설활동을 하며 보내는 동물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생명체의 배설 활동은 하찮게 들린다. 하지만 그 하찮은 일이 부지런히 먼지를 쌓는다. 먼지는 인간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우리는 쌓인 먼지를 청소한다. 어떤 때는 청소가 오늘의 나처럼 구덩이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 한 사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호들갑 없이 물건을 정리했다는 사실에서 얼마 전에 다녀온 경주 국립 박물관이 생각났다. 그 박물관은 내가 이제껏 보았던 박물관과는 사뭇 달랐다. 경주는 한국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경주 국립 박물관에 가보면 전시 유리창 너머로 유물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정말로 빼곡히. 한 뭉치의 비즈 목걸이들이 빨간색부터 남색까지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기다랗게 진열된 전시관을 보면서 내가 지금 당장 하나를 골라 살 수 있는 액세서리 가판대를 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다른 한 편에는 각종 철기 그릇과 항아리, 농기구 내지는 무기 같은 것들을 한데 모아 전시해 둔 곳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이런 상상을 했다. <이름 모를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괭이질을 하고 있다. 캥~ ‘아이! 이거 이거 유물이 또 나왔네. 어이 김씨 저기 박물관에 전화 좀 걸어봐. 저기 우리 집 대문 앞에 둘 테니까 내일 들고 가라고 해.’ 유물을 전달받은 박물관에서는 ‘어 저기 A8 구역에 자리가 있나? 없으면 안에 든 거 살짝 밀어 가지고 자리 마련해서 잘 진열합시다.’> 나는 저항 없이 웃음이 났다. 너무나 그럴듯해서다. 그때는 그 모습이 우스워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불필요한 위엄을 풍기지 않고 발굴한 모든 유물에 빠짐없이 전시실 한 자리를 내어주고 있던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보통 1mg에 수백 마리가 서식한다. 최대 2만 마리까지 발견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궁금해서 인간의 경우도 계산해 보았다. 인간은 1년에 평균 146kg의 배설물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세계 성인 평균 몸무게가 62kg라니까 인간의 수명이 3개월이라면 인간은 그동안 자기 체중의 0.6배만큼의 배설물을 만들어낸다.
작은 방 정리가 끝났다. 온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그 사이 면 에코 코스로 세탁기를 두 번을 더 돌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인 탓에 몸에 열이 나지만 마음은 시원하다. 더위가 시작될 즘부터 한 겹 두 겹 쌓인 우울이 옅어졌다. 집진드기의 배설활동이나, 한철 살다 마는 날파리나, 2mm의 타일 줄눈 사이에 핀 곰팡이가 엎어진 나를 일으키게 만들 줄 어떻게 알았겠나. 머릿속으로 상상한 위대한 결말에 위축되지 말고 움직여 만들어 낸 초라한 시작을 귀중히 여겨야겠다. 생각처럼 되는 일은 별로 없고 상상 그 이상의 일은 종종 벌어지니까. 하찮은 움직임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든 간에 마지막 순간에는 나 스스로 내 인생을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별의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인 초신성은 삶의 중간에 있지 않고 종말의 순간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