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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엽 Mar 10. 2018

낯선 남자와의 데이트

- 노라 존스, Don't know why


“정 선생님. 우리 한 번 뵐까요?”


“네. 대표님. 

언제든지 대표님 불러주실 때 나갈게요.”


“그럼 다음 주에 뵈어요. 

<을지로3가>역에서요.”


“네. 감사합니다.” 


제 책 <파산수업>의 

출판사 대표님께서 만나자는 전화에, 

저는 그저 반갑기만 했습니다. 


제 책이 나오고 나서 얼마 후, 

그러니까, 딱 작년 요맘때 만났으니, 

거의 일 년이 되었거든요. 


그때 사당역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클래식’에 관한 책을 한 권 내자!"고 

도원결의(桃園結義) 한 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저는 

지금 소속되어있는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표님과 그날 했던 약속은 

하나의 ‘부채’가 되어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대표님을 만나기로 한 

<을지로3가>역은 

멀기만 했습니다. 


저는 회사가 선릉역에 있어서 

출장 갈 일이 없으면 

거의 대부분을 

강남에서 해결하거든요. 


그걸 대표님께서도 아시는지, 

제 카톡메세지에 이렇게 남기셨습니다. 


‘정선생님... 

오늘은 강북의 정취를 함 느껴보세요^^’


‘을지로3가 근처 선술집인데 

술맛이 좋은데입니다 ㅎ’ 


퇴근길이라 숨쉬기로 힘든 

지하철 2호선. 


더군다나 비가 와서 

다른 분의 우산에 다리가 찔리기도 했습니다. 


지치고 힘든 퇴근길이지만, 

메시지를 보니 

갑자기 확- 하고 군침이 돌았습니다. 


성수역 근처에 도달할 무렵, 

대표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정 선생님. 

지금 어디쯤 오고 계세요? 

오늘 가기로 한 데가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장소를 옮겨야겠어요. 

일단, <을지로3가>역 6번 출구로 오세요.” 


박력있게 약속 장소를 변경하시는 대표님의 전화에 

‘음- 오늘의 만남 완전 기대된다!’는 생각이 

팍팍 솟았습니다. 


거의 일 년 만에 뵌 대표님은 

청년의 모습 그대로셨습니다. 

‘클래식 책 빨리 써서 보낼게요!’ 

라고 큰소리 빵빵 쳐놓고선 

회사로 잠적한(?) 저였지만, 


대표님께서는 

여전히 날씬한 몸매에 여유가 넘쳤습니다. 

(다행히 책 이야기는 거의 안하셨어요.) 


처음에 가기로 한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다음 기회를 노려야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근처 <을지면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편육에 평양냉면에 

소주를 곁들여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동안 저의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또 대표님께서 출간하신 책 뒷이야기, 

그러던 중에 친분이 있었던 

한 정치인의 성추행 이야기가 

TV에 나오면서 

잠시 저희의 대화는 멈추기도 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갑자기,


“정 선생님. 

혹시 여기 근처에 괜찮은 술집 한번 가보실래요? 

아마 깜짝 놀라실거에요.” 


하시며, 


“저만 따라오세요.” 


라고 하셨습니다. 


차도를 건너고 

가로등 없는 골목을 스치고 

이름 없는 인쇄소를 몇 개 지나자 

어두컴컴한 

네오사인 하나 없는 거리에 이르렀습니다. 


대표님은, 


“꼭 영화 <올드보이>에나 나올 법한 건물이죠?” 


하며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오, 마이 갓. 


그 곳은 

젊은이들과 몇몇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는 

묘한 분위기의 바였습니다. 


홍콩 영화에서 슬쩍 본 듯,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고,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술집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그렇다고 

우리나라 강남이나 이태원의 분위기와도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국적 없는 제3국의 분위기가 

저를 압도했습니다. 


붉지만 붉지만은 않고, 

어둡지만 곧 익숙해지는, 

묘한 정서를 지닌 술집이었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저 하나인 듯 했지만, 

얼핏 보면 

세미정장을 입은 사람도 보이는 것 같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 같은, 

본 듯 하지만, 

보지 못한, 

애매한 것 같지만, 

애매하지 않은, 

기억에 잊힐 것 같지만, 

기억날 것 같은,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그런 야릇한 분위기였습니다. 


흡연을 하는 분들을 따라 

창밖으로 나가보니 

네온사인 하나 없는, 

가로등 하나 없는, 

빌딩 숲 사이로 오롯이 밝혀진 

사이키 조명에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제가 좋아하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가 흘렀습니다. 


When I saw the break of day

I wished that I could fly away

Instead of kneeling in the sand

Catching teardrops in my hand

My heart is drenched in wine

But you'll be on my mind

Forever 


저희는 그곳을 나와 

명동성당을 향해 걸었습니다. 

성당 뒤편의 성모상 앞에서 성호경을 긋기도 하고, 

명동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옮겼습니다. 


시끌시끌한 가게들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는 

서로 붉어진 얼굴을 보며 

구본형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구요.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 이야기도 하다가, 

또, 

좋아하는 책 이야기도 하고, 

또 

성당에 가서 

성스러운 마음가짐도 가져보고, 

빈 속에 소주를 들이키며 

띵- 해지기도 하고, 

몽롱한 술집에서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기도 하는 

겨울의 끝자락-. 


저희는 여름이 오기 전에 

명동의 ‘향린교회’ 근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언제인지도, 

과연 진짜 만날 여유가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는 기약 없는 약속이, 

공허한 다짐이, 

언제인지 모르는 마감일자가 

더 다정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을 떠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주위에 있으신지요?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신도시>라는 술집에서 울리던 

노라 존스의 음악 Don't know why의 가사가 

가슴에 은은하게 울립니다. 

오늘 저에게 스며든 문학은 바로 이 가사입니다. 


동틀 무렵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나는 훨훨 날아가고 싶었어.

모래 위 무릎을 꿇는 대신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

내 마음은 와인에 흠뻑 젖어있지만,

너는 내 맘속에

남아 있을 거야.

영원히.


정재엽 (j.chung@hanmail.net)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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