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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엽 Sep 14. 2018

문학이 흐르는 도시

- 상트 페테르부르그 문학  

제가 도착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예술의 도시입니다.


1703년부터 약 200년 동안 러시아의 수도였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과거의 창대했던 문화유산들이 남아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표트르 대제가 도시의 가운데 흐르는 네바강을 보고는 ‘러시아의 베네치아’를 만들겠다며 기획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번이 저에게는 세 번째 방문입니다.


첫 번째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는데, 그때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3박4일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처음 입성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는 러시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지루했던 기차여행이 무척이나 신났던 기억이 납니다. 침대칸 2층에 계셨던 러시아 아주머니께서 까주시던 달걀과 러시아 홍차의 향기가 아직도 향긋합니다.



두 번째 방문은 아버지와 함께 현지 제약 산업 단지 육성 회의에 초청되어 간 것입니다. 공식적인 행사라 윗분들을 모셔야했고, 잠도 못자고 그저 호텔에서 보냈던지라 그다지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도 출장이라 개인적인 일정이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파트너 회사와 끝없는 미팅으로 시차에 바로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작은 공원들마다 문화 예술인에 대한 기념비들이 참 아름답게 조성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공원 근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점심을 먹으러 앉아있는데, 눈에 익은 비석이 보였습니다. 다름 아닌, 러시아 단편소설의 황금기를 연 ‘고골’의 기념비였습니다.


첫 방문 때는 도스토예프스키 생가와 그의 작품 ‘죄와 벌’의 배경이 된 하숙집들을 방문하느라 미처 고골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점심을 먹으러 앉은 공원에서 기념 비석으로나마 그의 모습을 보니 빡빡한 일정에 단비가 내리는 듯 했습니다. 그가 쓴 작품집을 여행가방에 넣은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읽으려고 했다기보다는 부피가 얇고 뭔가 여행서적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 챙겨 넣었는데, 이런 기막힌 우연을 만나게 되다니요! 그 책은 바로, <뻬쩨스부르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배경으로 쓴 고골의 단편 5개의 모음집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잘 알고 계시는 <코>와 <외투>를 비롯하여 <광인 일기>, <초상화>, 그리고 <네프스끼 거리>라는 작품이 담겨있습니다. 각 단편들도 부담이 없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고골의 소설들은 현실을 환상처럼, 환상을 현실처럼 어우러지는 독특함이 배어있습니다.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을 환상적으로 그려냅니다. 그의 강렬한 작품들을 읽다보면, 독특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과 신랄한 현실 풍자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책,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에 서 있다 보니, 앞서 말씀드린 ‘러시아의 베네치아’를 기치로 유럽 문명을 긴급히 수용하기 위해 만든 도시의 이면의 이야기들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호텔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다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졌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도 창밖은 백야 현상으로 아직도 밝기만 한데 말입니다. 고골이 그려낸 도시의 우울함과 아련함, 그리고 뛰어넘지 못하는 계급의 한계를 느끼며, 그가 이 도시 어딘가에서 작가로서 잠들지 못하며 고민했을 것을 상상해 봅니다. 아직 붉게 물들어있는 백야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언젠가 이 도시를 또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바램과 설렘으로 조용히 눈이 감깁니다.


정재엽 (j.chung@hanmail.net)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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