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만에 드디어 임신이라니.
그간 마음 졸였던 걸 생각하면 임신테스트기에 흐릿하게 찍혀있는 두 줄이 살짝 괘씸했다. 뭐가 그렇게 안 내켜서 이제야 왔니. 엄청 기쁠 줄 알았는데, 그것보단 안도감이 훨씬 컸다.
'적어도 불임은 아니었네,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나 자신이 엄마로서의 자격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잠시 들었다.
격앙되지 않는 내 감정에 불을 지피지 않기 위해, 별 일 아니란 듯 임테기 두 줄 사진을 남편에게 멋없게 카톡으로 보냈다. 사진을 확인한 남편도 다행히 나와 비슷한 온도. 설렘과 두려움이 반반이라고 했다.
'와, 이번엔 됐다! 근데 막상 정말 아기가 생겼다고 하니 어떻게 키울지 좀 걱정인데.ㅋㅋ'
일 년 동안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었기 때문인지 우리 둘 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병원 가서 확일할 때까지 너무 들뜨지 말자고 얘기했다. 설마 임테기 두 줄까지 나왔는데 아니진 않을 테지만.
임신 6주 차가 되면 질초음파로 아기집이 확실하게 보인다고 해서 6주 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산부인과에 미리 내원해도 아기집이 작으면 다시 기다렸다가 검사하러 가야 한다고 해서. 임신 준비 기간 동안 지인분들이 추천해 준 산부인과를 정해두긴 했지만, 임신 여부 확인은 간단하게 초음파로 가능하다고 해서 동네 산부인과를 찾아봤다.
그렇게 약 열흘은 임신출산 관련 도서도 읽고 나름 몸 조심하면서 약간 들뜬상태로 지냈다.
6주 차 첫 째 날 아침.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오전 근무가 있었던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동네 산부인과에 내원하기로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집 청소를 하던 중 느낌이 이상했다. 월경 첫날에 느껴지는 피가 흐르는 느낌. 이게 뭐지? 화장실에 가봤다.
흐릿하지만 확실한 붉은빛.
처음엔 착상혈 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6주 차에 착상혈이 나올 수가 있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피가 조금 더 흐르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구나.
남편과 내원하기로 했던 것도 잊은 채 얼른 옷을 입고 동네 산부인과로 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떠서 임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하혈을 했어요."
임신인 걸 알았을 땐 눈물이 쏟아질 만큼 기쁘진 않았는데, 피를 보고 나니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놀랐고 속상했다.
질초음파로 확인한 내 자궁엔 6주 차의 아기집이라고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아주 작은 아기집 같은 것이 있었고 의사도 임신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곧 나의 놀라고 속상했던 감정은 사라지게 된다.
"자궁경부암 검사는 언제 했어요?"
"작년 여름 직장인 건강검진 때 했어요."
"국가에서 해주는 자궁경부암 검사는 정확도가 낮은데, 다른 검사해 본 적 없다고요? 하.."
"네.."
"아기집은 일단 지금은 아기집이라 할 수 없고. 왜 임신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테스트기 두 줄이 나와서요.. 그럼 임신이 아닌가요?"
"임신인지는 다른 검사 더 해봐야 돼요."
"하혈은 괜찮은 건가요..?"
"검사하면서 지켜볼게요. 그건 그렇고 자궁근종 있는 거 알았어요, 몰랐어요? 일단 호르몬 검사해야 되니까 피 뽑고 자궁경부암 검사도 해야 돼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은 언제 하셨어요?"
국가에서 해주는 검사가 정확도가 낮아서 다른 검사를 따로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별다른 증상도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임신 중 하혈로 내원한 사람에게 자궁경부암 검사는 왜 자꾸 강조하는 건지, 자궁근종 있는 건 왜 혼날 일인지.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선생님, 오늘은 임신 관련 검사부터 하고 괜찮아지면 다른 검사는 다음에 남편이랑 상의하고 할게요."
임신인지 아닌지도 모른다고 하니 이건 유산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게 돼버렸다. 복잡한 머릿속. 임테기 두 줄, 아기집인지 아닌지 모르는 점 하나.. 지금도 조금씩 흐르고 있는 하혈.. 이것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의사가 대답했다.
"남편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예요? 본인 몸인데 본인이 검사해야죠."
방금까지도 놀라고 속상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어 끓어올랐다. 내가 이 산부인과에 내원한 이유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도, 물어봐도 알려주는 것 없이 자꾸 다른 진료를 덧붙이고 그걸 거절하니 비꼬듯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의사에게 놀랐겠다며 위로를 받고자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불쾌한 진료를 받는 게 괜찮은 것도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임신 검사만 하기로 했다. 바로 전날 집에서 임신테스트기를 했지만 의사가 임테기 검사도 해야 한다고 해서 소변 검사를 하고, 임신 호르몬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피검사를 했다. 이틀 뒤 한 번 더 검사해 호르몬 수치가 내려가면 유산인 거고 수치가 유지되거나 올라가면 더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난 지금 계속 하혈 중인데..? 그에 관해 물어보니 먼저 검사하고 주말 동안 하혈이 심해지면 큰 병원 응급실에 가라는 대답.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하혈에 관한 처치나 설명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난 계속 하혈 중이고 받은 검사는 사실 이 상황에선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하혈이 멎는다면 그때 임신 검사를 해서 상태를 확인하는 게 맞고, 지금은 하혈에 대한 처치가 아니면 무의미한 상황인 거다.
내 상태와 상관없이 잔뜩 돈만 벌려고 무의미한 검사들을 이것저것 강요했다는 게 내 결론이다.
당시엔 놀란 상태로 가서 제대로 판단할 여유가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차오른다.
결국 하혈은 멈추지 않았고 주말 동안 깨끗하게 내 자궁을 리셋했고 임신테스트기는 다시 명확한 한 줄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고맙게도 내 불쾌지수를 폭발시킨 그 의사 덕에 내 첫 임신의 유산은 슬픔 0%, 불쾌함 100%인 사건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그 이후 원래 가려고 알아두었던 산부인과에서 자궁근종과 자궁경부암, 임신에 관한 검사를 진행했다.
수정란이 착상되었지만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자라지 않은 채 일정 시간 유지되다가 탈락되기 때문에 아기집이 아주 작게 보였던 것이고, 하혈로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들뜨면 안 될 것 같았던 첫 임신.
그래도 임신이 된다는 가능성이 보였고, 걸러야 할 산부인과를 알게 되었고, 유산이란 것이 전혀 슬프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고, 건강하지 못한 수정란은 더 건강한 아가로 돌아올 거란 기대가 생겼다.
그렇게 담담하게 온 임신은 담담하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