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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채 May 29. 2023

퇴사하고 싶으세요?

퇴사 후 드는 생각


내일 모레면 퇴사한 지 만 6개월이 되는 36살 조기은퇴자.


나름 계획적인 퇴사였다. 

22년 말에 퇴사하는 것이 목표였고, 담보대출을 모두 갚고 퇴사하는 것이 미션이었고,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은 생활패턴을 만드는 것이 숙제였다. 

매년 꿈꾸던 퇴사를 미룬 가장 큰 이유는 꽤나 높은 월급이 내 발목을 잡았고, 일은 힘들었지만 함께 있는 동료들이 모두 좋은 것은 하루를 살아가는 데 꽤 큰 의지가 되었다.  


그러다 정말 퇴사를 실천에 옮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내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나 자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오던 나인데 하루 9시간 주 5일 직장에 나를 묶어뒀던 근본적 원인인 "월급"을 받고도 금융치료가 되지 않는 날이 온 것이다. 

월급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돌아보면 당시 마음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꺼져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고 갉아먹고 있었다.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치 나를 살리려고 내민 손 같았다. 

그렇게 나는 22년 12월 말, 과감하다 못해 대책 없게 퇴사를 감행했고 실패인 줄 알았던 미션은 생각보다 많이 받은 퇴직금 덕에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퇴사 후 내 통장 잔고 약 300만원. 다행히 남은 대출 없음. 

물론 남편이 돈을 벌고 있지만 남들에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놀고 먹는 여자로 비춰지기 싫었고, 나 자신에게도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처음엔 디지털 노마드니, 프로 블로거니 그런 걸로 돈을 벌면 될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쉽지 않았고 간간히 들어오는 주식 배당금과 미리 들어뒀던 적금이 만기되면서 개미 코딱지만큼의 수입이 있었다. 숙제를 풀기 위해선 당장은 지출을 줄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원래도 소비가 적은 편이라 지출 줄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쉬면서 마음이 안정되니 소비욕이라던가, 소유욕이 더 없어져서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희한하게도 통장 잔고는 줄지 않고 유지되는 중. 

고로 퇴사에 관련하여 목표 달성, 미션 성공, 숙제는 여전히 하는 중. 

나름 성공적인 퇴사라 백수생활 동안 걱정거리도 없고 껍데기만 남아있던 내 안에 다시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퇴사 후 단 하루도 누워있는 날 없이 알차게 보내는 중. 

9시간 동안 혼자 있어야 했던 개딸래미와 낮 산책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방치되기 일쑤였던 옥상텃밭을 가꾸고, 책도 읽고, 집 대청소는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한 달만 쉬면 심심하고 재미없을 거라며 붙잡던 직장 동료들의 말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즐거운데?! 

나 백수가 체질인가봐.


그러다 같은 직업을 가진 옛 친구들을 만났다. 쉬고 있는 나를 엄청 부러워하면서도 일하는 길을 선택한 친구들을 보니 갑자기 존경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더더욱. 

이 만남을 계기로 내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다들 힘든데 나만 죽는 소리한 걸까.

내 시간을 월급으로 교환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가치있는 다른 무언가를 해야하는 건 아닐까.

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남편에게 고민 상담을 하다가 결국 눈물이 터졌다. 

나 너무 한심해.

나에서 내가 그렇게 치를 떨던 직업을 빼고 나니, 나한테 뭐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예전엔 나도 모르게 나를 직업으로 정의했나 봐.

지금은 뭐라고 정의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게 너무 한심해.


이게 은퇴 후 찾아오는 자기혼란인가.

요즘은 내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좀 더 살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더 정확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직업적으로 내가 정말 해보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내가 졸업한 전공 관련 일이라는 것이다. (졸업한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선택했다.)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이걸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전혀 갖지 못한 채 대체로 성적에 맞춰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나 또한 36살에서야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이 시간을 월급으로 바꾸는 일보다 가치있게 느껴지고 있다. 


작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난 또 퇴사를 선택할 것이고, 

내 통장보단 나를 채우는 게 나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었다.

꼭 고통 받으면서 보낸 시간만이 아니라

행복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들을 가지는 것도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일을 하더라도 이 시간들이 있어야 좀 더 단단한 자세로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순간에 퇴사가 필요하다면,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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