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월드랠리팀은 WRC 활동 역사 최초로 드라이버즈 챔피언을 배출했다.
2024년 WRC 타이틀의 향방을 결정지을 최종전 일본 랠리가 11월 21일 막을 열었다. 드라이버즈 챔피언의 경우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의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이 단독 선두로 가장 타이틀에 가깝지만, 팀 동료 오트 타낙(Ott Tänak)이 25점 차이로 추격 중이었다. 팀 포인트에서는 선두 현대와 2위 도요타의 점수 차이가 15점뿐이라 예측하기 어려웠다. 현대팀 입장에서는 이번 시즌 드라이버즈 타이틀의 경우 누빌과 타낙 누가 차지해도 아쉬울 것 없지만, 팀 타이틀의 경우 적진인 일본에서 라이벌의 추격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 소속팀 2대의 합산 점수로 따지는 팀 득점에서 15점은 매우 근소한 차이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최종전으로 열린 일본 랠리는 올해로 부활 3년째를 맞았다. 2004년 최초의 일본 랠리는 홋카이도에서 열린 그레이블 랠리였다. 비용 부담과 환경오염 등의 비판 여론 때문에 2010년을 마지막으로 캘린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도요타가 WRC에 복귀하면서 일본 랠리의 부활이 본격화되었다. 이번에는 아이치현, 기후현이 위치한 중부지역에서 타막 랠리로 기획되었다.
특히 아이치현은 도요타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코로모시(挙母市)였던 도시 이름을 1958년에 지금과 같은 도요타시(豊田市)로 바꾼 일본 최대의 공업도시 중 하나다. 2022년 복귀 첫해는 누빌이 우승컵을 가져갔고, 지난해에는 엘핀 에반스(Elfyn Evans)가 홈팀 도요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일본 랠리는 노면의 포장 상태가 양호한 대신 노폭이 좁고 엄청나게 구불거리는 숲 속 산길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엄청나게 쌓여있는 낙엽도 복병. 비까지 내린다면 난이도는 대폭 올라간다. 올해는 다행히 비 예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혹한 조건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랠리1에서는 현대팀과 도요타팀이 각각 3대, M-스포트 포드가 2대로 총 8대가 엔트리했다. 현대팀은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다투게 될 누빌과 타낙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 대에는 안드레아스 미켈센(Andreas Mikkelsen)을 투입했다. 경기 전 득점은 누빌이 타낙보다 25점을 앞선 상황. 누빌이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여도 경기 중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36세의 벨기에 출신 누빌은 2013년부터 WRC 톱클래스에 데뷔했으며, 2014년부터 현대팀으로 이적해 올해로 11년째를 맞는다. 항상 챔피언 후보로 거론돼 왔으나 아쉽게 타이틀을 놓쳤으며, 올해야말로 챔피언 타이틀을 손에 넣기 직전인 상태였다. 추격자 타낙은 시즌 막판에 기세를 올렸다. 이탈리아 우승 후 핀란드에서는 아쉽게 리타이어했지만 직전에 열린 중부유럽 랠리를 포함해 최근 3경기에서 연속 포디엄으로 누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한편 시릴 아비테불(Cyril Abiteboul)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올해 누빌과 위데거(Martijn Wydaeghe), 타낙과 야르베오야(Martin Järveoja)의 노고에 깊이 감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두 팀이 현대 최초의 WRC 드라이버 및 코드라이버 타이틀을 가져오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도요타와의 경쟁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항상 강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시즌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홈그라운드의 도요타에서는 엘핀 에반스와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 그리고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가 출격했다. 현재 드라이버즈 포인트 3위인 에반스는 지난해 일본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바로 앞서 열린 중부유럽에서도 2위로 좋은 타막 랠리 페이스를 보여주었다. 한편 M-스포트 포드에서는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와 그레고와 뮌스터(Grégoire Munster)가 엔트리했다. 이번 시즌 좋은 페이스로 4번이나 포디엄에 올랐던 포모는 드라이버즈 포인트 5위에 올라 있다.
WRC2에서는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사미 파야리(Sami Pajari)가 마지막 도전을 시작했다. 현재 가장 높은 점수의 솔베르그(Oliver Solberg)가 7경기를 모두 소화한 상태이기 때문에 솔베르그와 15점 차이인 파야리는 우승 혹은 2위면 챔피언이 된다. 파야리의 챔피언 등극을 막아설 주요 경쟁자는 니콜라이 그리야진(Nikolay Gryazin)과 카에타노비치(Kajetan Kajetanowicz),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 정도다.
11월 21일 목요일 저녁 7시 5분. 도요타 스타디움 안에 마련된 SSS1에서 2024 WRC 최종전의 막이 올랐다. 실내 경기장에 마련된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는 지난해와 거의 비슷한 레이아웃에 세부적인 변화만 있었다. 중간에 360도 턴을 추가했으며 길이도 살짝 늘었다. 가장 먼저 선두로 올라선 것은 포모였다. 그리고 타낙이 뒤를 이었고 가츠타, 에반스, 오지에, 누빌 순으로 첫날을 마감했다. 미켈센은 막판에 연료 부족으로 속도가 줄어 시간을 잃었다.
11월 22일 금요일. 이세가미 터널 스테이지를 시작으로 이나부-시타라, 신시로까지 3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해 달린 후 오카자키 중앙공원에 마련된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를 2번 달리며 하루를 마감했다. SS2~SS9의 8개 스테이지 합산 거리는 126km였다. 이번 경기 중 가장 긴 23.67km의 이세가미 터널 구간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비좁은 터널 구간을 전속력으로 탈출한 뒤 완만하게 휘어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고난도 구간으로 유명하다. 올해는 날씨가 좋았지만 진흙으로 미끄러운 구간이 더러 있어 많은 참가자들을 괴롭혔다. 챔피언십 선두 누빌을 시작으로 타낙, 에반스 순으로 코스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선수가 하드와 소프트 타이어를 섞어 장착했다.
오프닝을 누빌이 잡은 가운데 종합 선두는 타낙의 몫이었다. 둘의 시차는 0.5초. 에반스가 그 뒤를 쫓았다. 오지에와 가츠타는 첫 스테이지부터 타이어 펑크로 시간을 잃었다. SS3의 톱타임은 오지에. 종합 선두는 여전히 타낙이었고 누빌과의 시차는 1.9초로 살짝 벌어졌다.
오전을 마무리하는 SS4 신시로에서 가뜩이나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 구도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누빌이 구동계 문제로 속도를 줄이면서 타낙의 타이틀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더군다나 금요일은 점심시간에 서비스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누빌은 속이 타 들어갔다. SS4를 마치자 에반스가 새로이 선두로 부상했고 타낙과 누빌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누빌의 차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오후에도 순위가 계속 떨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챔피언 가능성이 높아진 타낙이 오후에도 선두를 유지했고, 도요타 세력이 추격하는 양상이 지속되었다. 현대팀에서는 미켈센이 SS6에서 리타이어하면서 더블 타이틀 확보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좁은 길에서 진흙에 미끄러진 미켈센은 나무를 들이박고 멈추어 섰다. SS9까지 달려 금요일을 마친 시점에서 종합 선두는 타낙이었다. 그리고 에반스, 포모, 가츠타, 오지에가 뒤를 이었다. 누빌은 선두 타낙보다 1분 12초 떨어진 15위까지 밀려났다. 경기 직후 누빌은 “확실히 힘들었어요. 긍정적인 부분을 찾기 힘든 하루였습니다”라고 심정을 표현했다. WRC2에서는 그리야진을 선두로 파야리, 메켈란이 뒤쫓았다.
11월 23일 토요일은 오프닝인 가사기산(16.47km)을 시작으로 네노우에 고원, 에나로 이어지는 산악 도로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렸다. 이후 첫날 달렸던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정. 11.6km 길이의 네노우에 고원은 ‘고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해발고도 914m까지 오르는 등반 코스. SS10~SS16에 걸친 7개 스테이지 합산 거리는 103.87km였다.
마침내 차를 고치고 어제의 악몽에서 벗어난 누빌은 오프닝인 가사기산에서 5위를 기록해 스타트를 끊었다. 누빌은 “마침내 차가 다시 작동하고 속도를 낼 수 있게 됐습니다. 분명 오늘은 득점권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정말 까다롭고 미끄러운 코스예요.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디선가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누빌은 이어진 SS11 톱타임으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타낙이 여전히 선두이고 누빌은 12위. SS12에서는 가츠타가 하프 스핀으로 시간을 잃었고 포모까지 주행한 후 코스 내에 일반 차량이 무단 진입하면서 경기가 취소됐다. 이후 주행 순서인 차량에게는 같은 기록이 주어졌다. 누빌은 이제 종합 9위로 득점권에 복귀했다. WRC2 클래스의 그리야진과 파야리까지 제쳐 7위까지만 올라서면 잠정 4점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타이틀 확보는 보다 수월해진다. 토요일을 마친 시점에서 종합 선두는 여전히 타낙. 에반스와 오지에가 그 뒤를 이었고 포모, 가츠타 순이었다. 누빌은 7위로 힘겨운 하루를 마감했다. 이제 슈퍼 선데이에서 2점만 추가하면 타낙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타이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1월 24일 일요일. 이 날은 누카타 숲과 미카와코 호수 스테이지를 반복하는 사이에 도요타 스타디움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SSS20)가 끼어있는 구성이었다. SS17~SS21의 5개 스테이지 합산 70.57km 구간에서 최후의 승자를 가렸다. 오프닝인 SS17를 잡은 것은 미켈센이었다. SS6에서의 사고 후 미켈센과 현대팀은 슈퍼 선데이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타낙이 사고를 피하지 못하면서 누빌이 다소 이른 시기에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지었다.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던 누빌이 마침내 벨기에 최초의 WRC 챔피언으로 등극한 것이다. 아울러 현대팀 역시 첫 드라이버즈 챔피언 기록을 WRC 활동 역사에 아로새겼다.
기쁨에 찬 누빌은 나머지 타이틀에 대한 야망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매우 도전적인 한 해였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압박감이 엄청났어요. 특히 이번 마지막 경기는 더 힘들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제조사 챔피언을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할 수 있어요. 모든 트로피를 가지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누빌의 타이틀 확정과는 반대로 제조사 타이틀은 완전히 혼란 속에 빠졌다. 타낙의 리타이어로 에반스와 오지에가 토요일에 18점과 15점을 챙겼지만, 슈퍼 선데이 기록에서는 누빌과 미켈센이 1위와 2위로 현대팀과 도요타팀이 완전 동점인 상황. 따라서 오후에 시작되는 파워 스테이지에 모든 것이 걸렸다.
최종 스테이지 미카와코가 시작되었다. 랠리1 가운데 가장 먼저 코스에 들어선 미켈센은 도중에 나무와 살짝 충돌했지만 금세 복귀해 무사히 스테이지를 마쳤다. 이어서 누빌이 미켈센의 기록을 4.7초 단축하며 완주. 하지만 가츠타가 미켈센보다 빨랐고, 오지에가 누빌의 기록을 뛰어넘으면서 간발의 차이로 도요타가 제조사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갔다.
현대팀은 2014년 본격적으로 WRC에 복귀한 이래 10년 동안 2번의 제조사 챔피언 타이틀(2019년, 2020년)을 차지하며 강력한 명문팀으로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티에리 누빌은 그동안 2위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올해 드디어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숙원을 이루었다. 다만 타낙의 막판 리타이어로 제조사 타이틀까지 손에 넣겠다는 야망은 아쉽게도 달성할 수 없었다. 현대팀과 도요타팀 간의 라이벌 대결은 WRC 역사를 통틀어도 쉽게 볼 수 없는 대접전이었다. 최종 스테이지 직전까지 동점이었다가 결국 파워 스테이지에서 3점 차이로 운명이 갈렸다. WRC2에서는 클래스 2위로 경기를 마친 파야리가 타이틀을 가져갔다.
일본에서 2024 시즌을 마감한 WRC는 새로운 시즌까지 불과 8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내년 1월 23~26일 몬테카를로에서 2025 개막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내년 캘린더에는 크로아티아와 폴란드, 라트비아가 빠지는 대신 에스토니아가 복귀하고,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와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파라과이가 새롭게 합류해 14개 라운드로 늘어난다.
이 밖에도 많은 변화가 예정돼 있다. 우선 랠리1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퇴출된다. 환경 문제 등 시대적 흐름에 따라 2022년에 도입했으나 수리비용 증가 등을 이유로 퇴출을 원하는 팀 의견이 많았다. 하이브리드 패키지가 제거되는 만큼 차량이 가벼워지기 때문에 최소중량과 엔진 흡기제한 장치 등도 조정된다.
올해 새롭게 도입했던 득점 방식도 달라진다. 올해에 사용된 슈퍼 선데이 방식은 우승에 대한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아직까지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 또한 WRC 공식 파트너로 한국타이어가 선정돼 내년부터 3년간 새로운 타이어를 공급한다. 신형 타이어에 대한 빠른 적응도 선수들의 시즌 초반 성적에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대차는 모터스포츠 조직 전체적으로 적잖은 변화가 예고되어 있다. 제네시스 브랜드로 내구 레이스 최고봉인 하이퍼카(LMDh) 도전을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WRC에서의 성공적인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서킷 내구 레이싱 최고 클래스에 새롭게 도전장을 던진 현대차의 행보에 전 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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