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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Nov 13. 2019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저자 토니 주트(1948~2010)는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2008년 루게릭 병을 진단받고 2010년 병사했는데, 이 책은 병상에 누운 저자가 고통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써 내려간 유작이다.


저자는 시장의 효율성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를 일관되게 비판하며, 이를 맹종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걸출한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하여, 시장에는 적절한 정부 개입이 필요함을 강조했던 학자들을 다수 인용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저 맹목적으로 좌클릭을 하는 좌편향은 아니다. 칼 막스를 맹종했던 구좌파, 사회민주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했던 스칸디나비아 신좌파들의 오류와 실수도 가감 없이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좌파 학자의 편향된 시각을 담은 뻔한 책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좌우 진영과 여러 이데올로기의 흠결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결론은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으며, 그래도 우리가 취해야 할 대안은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겠냐고 완곡하게 호소한다. 다음은 본문 발췌


...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사회주의는 체제의 변화를 다룬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완전히 다른 생산 양식과 소유 체계에 기반을 둔 체제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반대로 사회민주주의는 타협의 산물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암묵적으로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틀 안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이제까지 무시되어 왔던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사회주의의 그 어떤 외형도, 그 어떤 아류도 모두 실패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을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저 이상에 불과해 보였던 것들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의 정치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사회주의라는 말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일종의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지난 반세기를 휩쓸었던 냉전 시대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선조들이 주장했던 아이디어의 많은 내용이, 현재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사회에서 매우 당연한 것들로 자리 잡았다.


공교육, 의료보험, 노인 기초연금, 대중교통, 철도... 이와 같은 것들은 시장 친화적 발상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현재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일상이 되어있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의 경제적 이윤이라는 국지적 이득을 넘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선순환되는 긍정적 효과를 낳고, 결국 사회 전체의 결실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잘 작동하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저자는 현실 정치가 낡은 이데올로기와 진영 이기주의 같은 것들로 인해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고, 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점에서 저자의 경고는 저자 생전 당대의 정치인뿐 아니라 현재의 모든 정치인에게도 유효한 것 같다.


한편 저자는 심화되어 가는 불평등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불평등이 문제인 이유를 단지 도덕적 불공정성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관계는 상호 신뢰와 계약으로 이어져 있는데, 불평등의 심화가 이런 신뢰 관계를 훼손해 결국 비용 증가와 비효율을 낳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평등 해소를 위해 우리가 이용해야 할 중재기구는 '국가'이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신중히 행사하는 가운데 국민이 그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본문 중 인용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칼 포퍼의 어록.


케인스는 눈에 띄게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1926년 경제학자들의 주요 과제는 "정부의 의제를 정부의 의제가 아닌 것과 끊임없이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칼 포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자유 시장은 역설적이다. 만약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독점 기업, 트러스트, 노조와 같은 준정치적 조직들이 개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장의 자유란 허무맹랑한 소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시장은 언제나 지나치게 강력한 참여자에 의해 왜곡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처럼 과도한 힘을 가진 시장 참여자의 실력 행사를 막기 위해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케인스와 포퍼 모두 당대의 기준으로 보수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운 경제학자, 철학자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생각을 마무리하며


역사학자 할아버지가 진심을 담아 웅변체로 서술한 글이었는데, 온갖 분야에서 논거를 차용해오는 탓에 모르는 분야가 나올 때마다 문맥을 놓쳤다. 개인적으로 이데올로기 논쟁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터라 더 집중하기 어려웠다.


다만 저자의 삶, 책을 쓸 당시의 심정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선한 의도를 품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만약 저승 같은 것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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