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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Sep 06. 2020

느낌의 진화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저명한 신경과학자다. 감정이 의사 결정이나 행동, 의식, 자아 인식 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고 '데카르트의 오류', '일어난 일에 대한 느낌', '스피노자의 뇌' 3부작 저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감수를 맡으신 박한선 님의 해제에 따르면,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다마지오 3부작의 외전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해제에서 책의 핵심 주장을 간결하게 요약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핵심 주장을 몇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 수십억 년 전 단세포 시절, 항상성 유지를 위해 생긴 마음의 전구체가 나타났다. 신경계가 나타나면서 개체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느낌을 탐지하고, 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는 주관성을 가진 의식을 형성했고, 이어서 추론과 상징이 가능해졌으며 언어적 서사 능력이 나타났다. 이는 개체의 유희적 실험과 집단적인 협력을 통해서 신체적 움직임이나 그 물리적 결과라는 형태로 창발 했으며 우리는 이를 '문화'라고 부른다. 이 모든 과정은 바로 유전과 진화라는 기전을 통해서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이해한 대로 다시 저자의 주장을 요약해본다. 저자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항상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비해 훨씬 포괄적이다. 항상성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중립이나 균형 상태, 원래 있던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이와 달리 저자가 정의하는 항상성이란, '좀 더 편안하고 좋은 상태를 향해 스스로를 상향 조절하는 생명의 작용'으로,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안녕 상태를 기반으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수반한다. 보다 나은 상태로의 추동을 이끌어낸다는 원리이자, 박테리아, 단세포 동물 수준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진화를 추동하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성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항상성은 진화의 근본 원리인 자연선택의 이면에 있는 가치이다. 항상성은 수십억 년 전 발생해 지금까지 존재하는 박테리아가 마치 인간의 사회, 문화적 행동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고, 이 연속선 상에서 현재 인류까지 도달한 진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다. 생명이 진화해 다세포 동물이 출현하고 신경계를 갖추게 되면서 항상성을 지각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느낌/감정/정서'를 갖추게 된 결과, 느낌은 항상성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책의 원제는 'The Strange Order of Things' 다. 저자는 13장에서 책의 제목을 지은 이유를 설명한다. 다음은 13장 본문 인용.


이 책의 원제목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정해졌다. 첫 번째는 무려 몇억 년 전 특정한 종류의 곤충 종들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 관습, 도구와 비교했을 때 문화적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사회적 행동, 관습, 도구의 집합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아마 몇십억 년 전에 단세포 유기체도 개념적으로 인간의 사회문화적 행동의 여러 측면들과 비슷한 사회적인 행동을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과는 확실히 배치된다. 생명 영위 방법을 개선할 수 있는 사회적 행동 같은 복잡한 행동은, 꼭 인간은 아니더라도 정교함을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인간과 가깝게 진화된 유기체들의 마음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기존의 생각이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사회적 특징들은 생명의 역사 초기에 출현했고, 생물권에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구 상에 인간 비슷한 생명체가 나타나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 순서는 정말로 이상한 것이며, 가장 보수적으로 말해도 예상치 못한 것이다.



다음은 내 소감


개인적으로는 대가의 저서라서 기대를 많이 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기대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저자는 연구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룬 동시에 몇 권의 대중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의 성격은 대중서 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 듯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모든 과학 서적 공통의 딜레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최근에 신경과학 책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이거나,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냥 내 취향에 잘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니...)


한편 3부에서는 인류의 문화, 예술, 종교, 과학, 철학과 같은 것들이 모두 항상성으로 환원? 될 수도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전개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항상성이 '더 나은 상태로의 추동을 이끌어내는 보편적 기제'이니,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기피하는 활동 모두 항상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다.


사실 이 대목에서 좀 갸우뚱했다. 저자는 항상성으로 진화론까지 쌈싸먹는 일반 이론 가설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실로 원대한 포부라 할 수 있다. 항상성 가설의 가장 큰 매력은 박테리아부터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의 행동 원리를 한 큐에 설명할 수 있다는 간명성이다. 다만 진화론으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인 진화심리학이 원죄론처럼 직면하는 비판이 '반증 가능하지 않고 환원적이다'는 것인데, 이 항상성 가설 또한 동일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모두 다 항상성으로 설명된다는 주장은 매우 명쾌하고 시원한 주장 같지만, 한편으로 이 가설이 확고한 경험적 증거를 폭넓게 수집해 과학계에서 공인받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 지능을 인공 지능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한편 3부 내용 중 제목을 보고 잠깐 꽂혀서 봤던 주제가 있는데, 인간 지능을 인공 지능으로 환원하고 대체할 수 있냐에 관한 대목이었다(11장 중 인간에 대한 알고리즘적 설명). 이 지점에서 저자는 강 인공지능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얼마 전 읽은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 가설과 대립하는 포지션으로 보인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느낌'이라는 현상은 유기체에게서 발현되는 것으로, 잘 조직된 특정한 화학반응이며, 열역학과 항상성 원리에 복종하는 것이므로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알고리즘으로 인간의 행동을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정신적 경험을 하는 것과 동질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곁들인다(이건 존 써얼의 중국어방 논변과 비슷하게 들린다).


둘째, '알고리즘'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예측 가능성과 불가변성은 더 높은 수준의 인간 행동과 마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고차원적 지적 활동은 알고리즘으로 환원하기 어렵지 않냐는 얘기 같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주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인간을 설명하는 것은 그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인간의 대의를 진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약 인공지능에 가까운 입장, 즉 인간을 보조할 수 있는 기계들과의 협업과 공존은 긍정적으로 본다는 입장을 표한다.


커즈와일이라면 아마도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비생산적인 비판이다'라고 받아쳤을 것 같다. 나도 커즈와일에 동의하는 바다.


첫 번째 주장에 대해, 나는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가 꼭 물리/화학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과정을 재현해야할 필요있는가?" 라는 입장이다. 내부가 어떻게 작동하건 결과적으로 인간과 같거나 그에 근사한 행동을 뱉어낼 수 있으면 기능적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두 번째 주장과 관련하여, 최근 딥러닝의 성취는 전통적 규칙 기반 알고리즘의 성능을 뛰어넘은 지 오래이며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차원적 정신 활동을 기계가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응용적인 면에서는, 저자가 지지하는 약 인공지능 입장의 결론이 강 인공지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 인공지능이건 약 인공지능이건 인간이 잘 써먹을 수 있는 도구이자 친구 같은 존재가 되면 그만 아닌가.


세 번째 주장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으나, 논리는 다소 궁색한 것 같다. 유발 하라리와 닉 보스트롬의 디스토피아적 주장을 인용하며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주장을 펼치는데, 마지막 문장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그럼 인공지능을 잘 만들고 대책을 잘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인류가 지금까지 발명한 모든 제도와 기술과 과학적 발견은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서 덜 불완전한 상태를 지향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 과정의 종착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상되는 부작용을 우려해서 뭔가를 시도하지 않거나 가능성을 일축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을 마무리하며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나 뵙던 대가의 대중서를 처음 읽었으나 기대에 비해 만족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해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명성에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누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내 취향에 맞지 않았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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