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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Sep 12. 2020

일상 에세이

9월 어느 날 비오는 설악산 자락 도서관에 앉아

속초에 집을 구한지 어느덧 한 달 반, 이제 이곳에서의 일상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일하고 밥 먹고 산책하고 일하고 밥 먹고 뛰고 술 마시면서 살고 있다.


이제 곧 서핑과 스노클링, 프리다이빙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자고로 운동은 몸에 익을 때까지 매일 해야 하고, 매일 계속하려면 집에서 가까워야 한다. 아마도 거리 상의 이점 때문에 걸어서 3분 거리인 장사항에서 스노클링과 프리다이빙을 하고, 차로 10분 거리인 천진 해변에서 서핑을 하게 될 것이다.

 


1. 일상

 

속초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일상은 어찌 보면 서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출근을 하고, 밥 먹고 잠깐 쉬다가, 다시 일하다가 책상 앞에서 퇴근한다. 서울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는 풍경, 점심 먹으러 나가면서 보는 풍경, 저녁에 퇴근하고 나가서 보는 풍경이 서울과 많이 다르다. 산, 호수, 바다를 모두 볼 수 있는 풍경은 서울에는 없으니까.

 

서울에서 내가 퇴근하고 하던 일은 주로 책 읽기, 글쓰기, 술 마시기였다. 속초에서 하는 일도 지금까지 한 달 반만 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술 마시기의 비중이 9할 정도로 높아진 것이 다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술은 좀 줄이고 당초 이곳에 오며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제 좀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에 물놀이부터 시작해야겠다.

 

어제 하루는 꽤나 꽉 채워서 산 것 같다. 하루를 시간 순으로 적어봤다.

 

오전 9시 늦잠 자고 일어나 원격으로 판교 사무실에 있는 내 컴퓨터에 로그인해 출근

오전 10시경 시내 이비인후과에 진료를 보러 외출

오전 11시 30분 차 타고 나간 김에 쌀국수 한 그릇 먹고 들어오는 길에 영랑호 한 바퀴

오후 12시 30분 업무 복귀. 화상회의 3건 참석

오후 6시 50분 퇴근 후 간단하게 햇반을 데워서 저녁 식사

오후 7시 30분 서울에 계신 분들과 월 1회 모이는 독서 모임에 화상으로 참석

오후 9시 40분 앞집 형과 영랑호 달리기로 하루 마무리

오후 11시 앞집 형과 한 잔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다시 알코올의 유혹에 회유당해 혼술. 에어프라이어로 군만두 1종, 트란지아 코펠로 찐만두 2종을 조리해 소주와 함께 넷플릭스 보다가 취침

 

적어놓고 보니 서울에서 살던 하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난 서울에 있을 때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했다. 달라진 건 내가 있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서울에서 만나던 사람들을 화상으로 만나는 게 가장 큰 차이다. 하지만 내가 서울에 있었다 한들 이 사람들을 화상으로 만났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나를 보며 앞집 형은 미래에서 온 사람 같다고 다.



2. 산다는 것의 의미


근 몇 년 한 달 살기가 유행했다. 제주나 속초처럼 예쁘고 평화로운 곳에서 한 달씩 쉬는 건 아마 누구나 해보고 싶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렇게 한 달을 사는 건 진정한 의미에서 ‘산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산다는 건 잠깐의 일탈처럼 무언가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달 살기는 한 달 ‘쉬기’ 정도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산다는 것은 그곳에서 일과 육아 같은 것들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걸 뜻한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주했다 실패해서 다시 상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현지에서 일터를 잡는데 실패하거나, 결혼한 사람의 경우 배우자와 뜻이 맞지 않거나 육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해 서울로 돌아간다. 나처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은 사람은 한결 움직이기 가볍지만, 일자리 문제에서는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좋은 직장은 다 서울과 수도권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위를 보면 속초에 이주해 사는 서울 사람들은 다 자영업이나 전문직 종사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영업이나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은퇴 전에 서울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창궐이 나에게 변수를 가져다주었다. 이 몹쓸 전염병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이로 인한 재택근무의 장기화는 역설적으로 나에게 서울을 벗어날 기회를 줬다. 물론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며, 따라서 나의 속초살이가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뭐 아무렴 어떤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매 순간 불확실성을 마주한다는 것이니. 세상에 완전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 경제적 자유


근 몇 년간 늘 바랬던 것은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의 크기는 대략 한화 50억에서 100억 정도였다. 이 정도 부가 있다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시간을 바꾸는 일상의 족쇄를 끊고 엑싯하는 것,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취하기가 매우 어렵기에 평범한 사람 대부분은 월급을 받기 위해 도시에 삶이 묶인다.


경제적 자유를 얻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당기기 위한 방편으로, 지난 3년 주식 투자를 매우 진지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깨달음도 얻었고, 덤으로 스트레스도 받아 건강도 조금 상했다. 올 한 해 들어 병원비만 300만 원 정도를 지출했는데, 과거 잔병치레 한 번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나로서는 꽤 묵직한 이상신호인 셈이다. 그리고 이 이상신호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3년 간 주식 시장이 매우 스펙터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식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2017년 하반기는 코스피 지수가 5~6년의 박스권을 깨고 2400을 돌파했던 시점인데, 몇 달 지나지 않아 2600 정도에서 고점을 찍고 이후 2년 반 동안 하락장세가 이어졌다. 이후 시장은 2020년 3월 17일 대략 1460 까지 하락하며 나에게도 엄청난 공포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는데, 다행히도 2020년 9월 현재 다시 2400 언저리에 와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시장에 진입한 시점은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달려든 뒤의 막차였다. 나처럼 생전 관심 없는 사람이 뛰어드는 것이 바로 고점의 징후인데, 나 다음에 사줄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후 연출된 하락장에서 나 같은 초보자가 누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은 체육관에 갓 등록한 취미 복서가 시합에 나가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확률이 낮은 일이었다. 그저 그 무서운 하락장에서 살아남아 얼마간이라도 수익이 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따름이다. 그 수익으로 차를 사고 속초살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4.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앞에서 나는 충분한 부를 원하는 이유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얻기 위함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평하고 희소한 자원이 ‘시간’이라고 한다면, 경제적 자유(충분한 부)는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를 얻기 위한 필요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에는 부 외에도 다른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건강이다. 최근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건강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처음엔 손목이 아파서 물리치료와 충격파 치료를 받았다. 조금 낫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발목이 아파서 물리치료, 충격파 치료, 한의원 침을 맞기 시작했다. 내 짐작에 코로나19 때문에 자택 연금 상태에 처했던 3~4월 경, 신체 활동량이 줄어들고 마사지샵과 목욕탕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더 악화되었던 것 같다. 발목 통증은 거의 반년 정도 지속되며 운동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나를 얽어맸다. 매우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이어서 찾아온 것은 난청이었다. 6월 경이었던가, 어느 날 재택근무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00시 40분이었다. 사실 그 전날부터 왼쪽 귀가 좀 먹먹한 증상이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맥주 한 잔 하고 자고 일어나 다음날도 재택근무를 했다. 그리고 00시 40분에 퇴근한 그 토요일 새벽에도, 쓰나미 같은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한 잔 하고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돌발성 난청 의심 소견을 주며 상급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긴급 처치를 하지 않으면 청력 영구 손실이 오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너무 어이가 없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한편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가서 스테로이드 과잉 요법을 처방받고 또 이따금씩 병원을 몇 차례 다녀온 결과 지금은 청력이 거의 회복되었다. 이따금씩 이명과 경미한 저음역 난청 현상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어제 진료를 받은 속초 서울이비인후과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마도 돌발성 난청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누구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운동 안 하고 술 많이 마시면 이런 증상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부디 이 말씀이 진실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 때 음악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던 나에게 청력이 손실된다는 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걷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이런 무서운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 자유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충분한 돈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내 신체가 온전히 기능해야 하고, 심리학적으로는 내 마음을 온전하게 추슬러 균형 잡힌 관점으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속초에 온 뒤로 건강도 거의 회복한 것 같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일까. 여기에 더해 이제 술 줄이고 운동만 조금 더 하면 아주 좋을 것이다.



5. 사진 몇 장


사진을 잘 찍는 재주는 없고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인스타그램도 유튜브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역시 난 글 쓰는 게 가장 편하고 익숙하다. 그래도 요즘은 이 일상의 기록을 잘 남겨두고 싶어서 사진도 많이 찍고 인스타그램도 조금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이 글은 최근 찍었던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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