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꼭 빈 말은 아니었던 이유라면 이유랄까 하여튼
어제, 역사적으로 브런치스토리에 입성을 하고 난 후 뭔 글을 쓸까 하다가
아, 그렇군.
왜 스물여덟에 죽겠다고 큰소리를 쳤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내가 지금 소설가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
일단 탄생설화(하하)에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약전(略傳)을 올린다.
100매 다 되는 글이어서 3부로 나누어서.
이곳 작가님들이 보기에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어머니 아버지 시대의 삶을 엿본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뭐... 생각할 거리가 1은 있겠지...
1부 (1958~1970)
1958년. 서울, 뛰어가면 5분 걸리는 舊 서울 사대와 고려대학교 사이, 꽤나 학구적인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에서 태어남. 태어난 그곳에서 질리지도 않고 십팔 년이나 살아냄. 방이 다섯 개이고 중문과 쇠로 된 둥그런 문고리가 달린 나무 대문, 그리고 화장실이 두 개인,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였던 디귿자 형의 신축 한옥에서였다.
1964년. 국민학교 입학(왜 국민학교,라고 쓰면 초등학교라고 자동변환되느냔 말이다. 난 꼭 국. 민. 학. 교.라고 써야겠다. 그땐 국민학교였으니까!)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언니를 쫓아 만화 가게에 가서 만화책을 봄. 특히 엄희자와 박기정을 좋아했다. 집에는 각종 아동문학전집이 태산처럼 진열되어 있어서 자연스레 글자를 익힘.
이후, 책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자리 잡게 됨. 밥을 먹을 때도, 야단맞고 울면서도, 강아지와 놀면서도 책을 놓지 않음. 이런 모습을 보고 대견스러워하는 부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더욱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남.
1965년. 2학년 때 처음으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음. 당시 세 살 위인 언니가 최우수상을 받는 바람에 장려상을 받은 나는 집에서는 명함도 못 내밈.
(그때 나는 시계에 대하여 쓴 기억이 나는데 2학년답게 ‘시계는 괴롭겠다. 밤에도 잠을 못 자니 불쌍하다. 시계를 밤에 재우려면 시계 밥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침마다 잊지도 않고 시계 밥을 주신다, 그래서 오늘도 잠 못 자는 시계! 밤에 들리는 초침 소리가 슬프게 들린다’ 그런 내용이었고, 3학년이었던 언니는 ‘군밤’이라는 제목으로 몰래 아버지 방에 들어가 숨겨놓은 군밤을 하나씩 훔쳐 먹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진짜 솔직하게 잘 썼다.
이후, 무슨 글짓기 대회에서 나도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피아노를 선물로 사주심.
“누구야, 네가 글을 잘 쓰니까 선물이다.”
피아노를 들여놓은 날, 아버지의 그 말에 천하의 심통쟁이 언니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우리가 무슨 에서와 야곱도 아닌데, 언니는 엄마가 좋아했고, 나는 아버지가 이뻐한다는 것은 온 동네 사람이 다 알았다. 자식을 그렇게 눈에 보이도록 차별하면 안 된다. 언니는 틈만 나면 나를 두들겨 팼다. 나는 맷집이 무럭무럭 자라 웬만하면 울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2학년 겨울방학을 마친 1966년 2월 개학식 날, 엄마에게 다듬이 방망이로 맞았다. 얇은 노트만 한 ‘겨울방학 공부’ 책은 물론, 일기, 과제물, 만들기 등 일체의 방학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가려다가 엄마에게 발각된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이왕 단련된 몸이니 그냥 몸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집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결국 방학숙제는 개학 날, 날밤을 새워 반쯤 해갔다. 언니 역시 동생 공부도 봐주지 않고 대체 뭐 했느냐고 몇 대 얻어터지고(언니는 맞으면서 나를 째려보았는데 그때 이미 나는 후환이 얼마나 길지 알았다.), 나와 함께 밤을 새우며 일기 써주고, 숙제해줬다. 평소에도 나를 때리는 취미가 있던 언니는 개학 다음 날, 깡패처럼 뒷간 옆으로 끌고 가서 나를 흠씬 두들겨 팼다. 나는 선생님한테만 몇 대 맞으면 될 것을, 엄마에게 맞고, 언니에게 맞고 보통 손해를 본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야비하게 방학 숙제 검사 같은 것 하지 않았다. 아들도 나처럼 다 생각이 있었다. 내가 숙제 다 했느냐, 하고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면, 그냥 몸으로 때우겠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나는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넘어갔다. 아참, 조언도 해주었다. ‘매 맞을 땐, 뒷줄로 가서 서라. 선생님 힘 빠진 다음에 맞으면 덜 아프다.’
1966년. 3학년 때 같은 반에 있던 한 아이를 좋아했다. 그 자식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알콩달콩 지냈다. 철 모르는 척하고 어깨동무하면서 걷는 기분이 죽여줬다. 아이는 우리 집에도 종종 놀러 와서 동화책도 같이 읽고 피아노를 치면서 놀았다. 아이는 내가 더듬거리면서 바이엘이나 동요를 치면 경이로운 눈초리로 나를, 건반을 누르는 나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참 감미로운 시간이었다. 그 자식이 위인전 한 권 우리 집에서 빌려갔는데 아직도 안 돌려주고 있다. 이 자식아, 지금이라도 빨리 돌려줘!
1967년. 콩나물시루처럼 90여 명이 와글거리던 4학년 때, 딱 한 번 2등까지 해 봄.(전교가 아니라 반에서) 그것은 순수한 내 실력이 아니라 치맛바람이 장난 아니던 엄마의 입김과 당시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한 덕택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지만 그때는 반에서 잘 산다 하는 아이들 몇 명을 모아놓고 담임이 가르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평소 실력은 반에서 5등 안팎이었는데 공부 시간에 졸거나 딴짓한 기억은 없지만 집에서 공부한 기억도 전혀 없다. 굳세게 놀아도 야단치지 않는 부모를 만난 덕이었다. 당시 사업을 확장하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 해 봄, 4. 19 의거 기념 글짓기를 했는데 좀 큰 상을 탔다. 매우 솔직한 내용이었다. ‘4 19 의거에 앞장선 학생오빠들은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골목으로 도망쳐 꼼짝도 안 했을 텐데, 지금도 안암동 로터리에서 데모하는 고려대학교 대학생 오빠들을 보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총 맞을 텐데, 총 맞아 다치거나 죽으면 불효가 아닌가!’ 그런 약간은 엉뚱한 이야기였던 기억이 난다.
그 해 가을, 경희대학교에서 무슨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자잘한 교내 글짓기 상을 몇 개 탄 덕에 뽑혀 대회를 나갔다. 시제는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육교’였다. 큰 대회에 처음 나간 나는 왕창 졸아서 정석대로 글을 썼다. 이를테면 새마을 홍보 글 같은, 육교가 생겨서 너무너무 좋아요, 이런 투였다. 그런데 같이 대회에 나간 다른 반의, 나와 동명이인인 아이가 아주 큰 상을 탔다. 그 아이는 제법 똑똑하던 나보다 좀 더 똑똑했고, 좀 더 이뻤고, 그리고 제법 빵빵하던 우리 집보다 좀 더 빵빵했다. 그 아이와는 5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 아이는 부반장, 나는 줄반장 이런 식으로 계속 그 아이 뒤에 쳐져, 이류, 내지는 아류에 머물렀다. 그것은 나에게 어느 정도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1968년. 5학년이 되자 약간 위태해진 사업 때문에 엄마는 학교에 올 시간이 없었고, 나는 ‘살만큼 살면서도 봉투 하나 학교에 들고 오지 않는 엄마 때문에’ 미운털이 잔뜩 박혀 일 년 내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이유 없는 박해를 당했다. 어느 땐 동명이인의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내가 뒤집어쓰고 신데렐라처럼 숨죽여 운 적도 있었다. 분필가루 날리는 것이 싫다고 칠판에 판서 한 번 안 한 위인이 바로 그 담임이었다. 공부는 전혀 가르치지도 않으면서 미친년 이야기만 시리즈로 했던(믿을 수 없겠지만 미친년 시리즈 중 하나만 말해주겠다. “어떤 미친년이 있었어. 그년은 미쳤으니까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온 동네를 활보하는데, 글쎄 그년의 똥구멍에는 언제 먹었는지 모를 콩나물이 비죽이 나와 있는 거야, 그런 미친년이 누군 줄 아니? 바로 너네 엄마들이다!”)그 담임의 이름을 나는 잊지 못한다. 때마침,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한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욧’ 하고 죽은 녀석과 이름이 똑같다는 것만 알려주고 싶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당시 나는 너무 궁금했다. 승복인가 하는 아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욧, 하고 외친 그 소리는 대체 누가 듣고 소문을 냈단 말인가. 그곳에 있는 사람은 다 몰살당했다는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난다. 당시 국어 책에 ‘면’이라는 아이가 등장하는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곳에서도 면이 왜군에 의해 장렬하게 죽는 장면이 실화처럼 생생하게 나오는데 나는 또 궁금해졌다. 대체 면이 읊조린 멋진 대사는 누가 소문을 냈을까? 설마 면을 죽인 왜군이 -왜군 쪽에서 보면 싸가지 없는 자식이었을 텐데 - 그렇게 미화해서 전해줬을 리도 만무하고. 당시 나에게는 그런 의문이 많았다.
나는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엄마,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 좀 만나! 엄마는 바빴다. 결국 11월도 다 지나서야 엄마가 겨우 학교에 들렀다. 나는 엄마가 저런 천하에 못된 인간에게 봉투를 주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내 일기장은 담임의 비리에 대하여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장이 무슨 소용이 있나!
담임이 제법 두툼한 봉투를 받은 그날 오후부터 나는 청소에서 제외되었고, 새로운 차별이 시작되었다. 나는 착하고, 영리하고, 예의 바르고, 책임감이 강한, 아주 모범적인 어린이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모범적인 나는 청소시간이 되면 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누구누구 개새끼! 이런 낙서를 하면서 놀았다. 어마어마한 욕을 쓰다가 누군가 지나가면 발로 쓱 문댈 때 기분이 진짜 좋았다.
1969년. 6학년이 되다. 아버지 사업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의 의식이 생김.
그래도 여름에는 비싼 샌들을 신고, 추석빔으로는 담임 월급의 두어 배 정도 되는 가격의 옷을 입고 다녔고, 담임선생님의 과외지도를 받았다.
어느 날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던 담임이 물었다. 유치한 질문이었다.
“너, 그 옷 얼마라디?”
똑똑했던 나는 엄마와 가게 주인과 흥정하던 옷의 가격을 기억하고 있었다.
“삼천 원이라던데요?”
휴, 하고 담임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또 유치하게 말했다.
“너는 좋겠다, 좋은 부모님을 두어서.”
역시 똑똑했던 나는 ‘좋은’의 의미가 ‘돈 많은’이라고 해석할 줄도 알았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당시 한 달 월사금이 90원이었고, 달마다 학교에서 봉투를 집으로 보내면 아이들은 한. 달치씩 가지고 오곤 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일수 찍듯 도장을 찍어주었다. 일 년 치 월사금이 겨우 108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겨울 방학 내내 나는 민중서간 판 한국문학 대전집을 읽었다. 서른몇 권으로 이루어진(서른여덟 권으로 기억한다) 두꺼운 책이었지만 내용이 아삼삼하여 놓을 수가 없었다. 4학년 무렵부터 한 권 두 권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확실하게 맛이 들려버린 것이다. 이제 동화책은 유치해서 들여다보기 싫었다. 하룻밤 같이 잤다,라는 문장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던가! 노벨 문학상 전집과 일본 문학전집, 그리고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전집도 그때 읽은 기억이 난다.
1970년 2월,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우리 집은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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