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이후 나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로 해야 하겠지만...
100쇄나 찍은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 프롤로그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같은 연배의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새의 선물은 100쇄 찍을만큼 명작이다. (부럽)
나를 더듬어보니 열두 살 이후의 삶은 파란만장이었어라.
열 두 살 이후 나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2부.
50년 전 중딩시절 이야기를 지금 끄집어내려니 좀 쑥쓰럽기도 하지만.
소설쓰러 도서관에 출근한 어느날, 쓰고 싶은 소설은 한 문장도 써지지 않아 고통당하다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던 나의 히스토리를 대략이나마 써놓자, 이런 생각으로 거의 한달음에 -그런 걸 일필휘지라고 한다나 뭐라나- 쓰고 나서 보니, 원고지 100장 가까이 되는 분량이...
하여 오늘은 중딩시절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요즘과는 많이 다르려나? 중딩생활이?
할 말이 하도 많아 년도별로 정리했다.
1970년. 중학생이 되었다. 헐렁한 교복을 입고, 신주머니를 땅에 질질 끌고 다니면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사람들의 땀 냄새와 걸핏 하면 튀어나오는 욕지거리, 등 뒤에서 밀쳐대는 수상한 사내들의 접촉, 커다랗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새마을 버전의 연속극을 들으면서, 20여 분을 견디어야 했다.
처음으로 시험을 치뤘는데 성적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33등! 3등도 아니고 33등이라니! 알고 보니 학교에서는 우열반을 편성한 것이고, 내가 속한 반은 우반이었다. 아무리 우반이라 해도 33등은 충격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시력은 엉망이었고, 나는 안경이 없었고, 칠판 글씨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가난해진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33등을 해서 죄송해요. 안경을 사 주시면 공부 잘 하겠어요. 편지를 읽으면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까만 뿔테의 안경이 생겼다. 나는 늘 안경이 깨지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 발로 밟는다거나,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가 안경이 떨어져 안경다리가 부러지는 꿈에서 깨어나면 진땀을 흘렸다.
어머니 날, 학교에서 어머니들을 초청해서 조그만 다과회를 했는데 나는 대표로 어머니에 대한 시를 써서 낭독했다. 갑자기 늙어버린 엄마는 나의 시를 들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으로 발령받은 초짜 담임은 나를 추켜세웠다. 아주 글을 잘 쓰는구나. 작가가 되겠다.
미래의 작가는 대회 때마다 상을 받기 시작했다. 큼큼한 냄새가 나고, 벌레가 기어 나오는 헌책이 가득한 학교 도서관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다른 아이들이 교과서를 보고 문제를 푸는 동안에 말이다.
집은 점점 더 기울어져 갔다. 아버지의 서재와 피아노가 놓여있던 응접실은 세를 주었다. 방 한 칸에 다섯 식구, 여섯 식구들이 북적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걸핏하면 싸우고, 술을 마시고 마당에 누워버리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 집 부엌에서 무엇인가 슬쩍 가져가곤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하던 식모아줌마도 가방을 쌌다.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아줌마는 월급도 받지 않고 오래 동안 식구처럼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차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잡부금 용지가 나오면 혼자 고민하다가 찢어버렸다. 쉬는 시간에 매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철없는 것들!’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실은 나도 땅콩 샌드위치나 크래커를 아삭거리고 싶었다.
집에 가보아도 지천에 널려있던 간식거리는 없었다. 나는 늘 배가 고픈 아이가 되었다. 어딘지, 무엇인지 모를 허한 기분이 온종일 나를 짓눌렀다.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치맛단이 틑어져도, 날마다 빨아서 다림질을 해야 하는 하얀 칼라도 엄마는 신경 써주지 않았다. 상장을 타다 주어도 엄마는 웃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웃을 여력이 없을 만큼 엄마는 피폐해 있었다. 그 해 여름도 가기 전, 엄마는 음독했다.
한 밤중, 갑자기 온 집안에 불이 켜졌다. 아버지의 짧고 나직한 비명,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 온 집안을 소란스레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심장을 눌렀다. 나는 깨어났지만 이불을 더 뒤집어썼다.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엄마와 연관되어 있으며 어쩌면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면서도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장자의 나비 꿈을 떠올렸다. 이것은 꿈이다. 그리고 반드시 꿈이어야 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더시 꿈을 꾸려고 눈을 꼭 감았다. 정말 모든 것이 꿈같았다.
다음 날, 할머니가 아침 밥상을 내왔다. 아무도 엄마가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 없는 밥상에 둘러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엄마는 이 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열세 살, 나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었다.
겨울 즈음 학급에서 개인 문집을 숙제로 내주었다. 나는 노트 몇 권 분량의 글을 묶어 문집을 만들었다. ‘악녀’라는 제목의 시가 기억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악녀가 좋고, 그러므로 나는 힘써서 악녀가 되겠다는 결심이 시 속에 올올이 박혀 있었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은 그때부터였을까? (계속)
작년에 개봉된 홍상수 감독의 <소설가의 영화>.
순전히 제목 때문에 소장용으로 구매했다.
조용하고 잔잔하고 쉼이 많아서 (나는) 좋았다.
가끔 열어본다. 내가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소설가 #소설쓰는여자 #한국문학 #자서전쓰기 #소설가의영화 #자전소설 #중딩시절 #70년대라떼시절 #사춘기 #문학 #에세이스트 #파란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