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보겠다며 남편과 함께 파리에 도착한 바로 그 겨울, 우리는 코로나를 맞이했다.
중국에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건, 연금개혁으로 인한 프랑스 총파업이 겨우 진정된 후였다.
프랑스는 총파업이 시작되면 특히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된다고 보면 된다. 지하철도 끊겨 우리가 다니던 코워킹 플레이스까지 가는데 거의 한 시간을 걸어 다녔다. 오자마자 프랑스를 제대로 맛보게 되었다며 툴툴거렸는데 파업보다 더 큰 것이 와버렸다.
코로나 초기, 제대로 된 정보가 없던 유럽에서는 코로나가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전염되는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아시아인 인종차별이 문제 되기 시작했다. 주요 신문의 1면에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토론방송도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프랑스에서 4년간 유학을 했던 나는 그 당시 전혀 겪지 못했던 이 상황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난민 문제, 테러 등으로 프랑스의 분위기가 몇 년간 더 험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아시아인이 특정되어 공격되었던 적은 없었던 터라 매우 더 두려웠다.
불어를 잘하건 못하건은 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태어난 동양계 프랑스인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냥 내 외모가 ‘동양인’이면 난 그들에게 그냥 바이러스를 몰고 온 ‘중국인’에 불과했다.
프랑스에 다시 올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을 때, 나의 마음 한구석에 해결되지 못한 고민은 프랑스의 복잡한 행정절차나 불편한 여러 가지 삶의 시스템들보다 내가 이곳 프랑스에 존재하는 순간, ‘동양인 여자’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생각보다 더 빨리 더 심각하고 커다란 모습으로 프랑스에 다시 온 내게 닥쳤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처음 살아보는 남편보다 내게 그 두려움은 더 크게 다가왔고, 특히 ‘여성’으로서 혼자 다니다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도대체 이전에 4년 동안 어떻게 혼자서 유학생활을 했었는지는 모를 정도로 혼자 다니는 걸 극도로 경계했었다.
슈퍼마켓에서 나와 우연히 부딪혔던 그 백인 여성의 눈빛은 1년이 지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과 부딪혔다는 극도의 경계심과 불안함.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버린 그 표정과 눈빛에 난 파흐동 ‘Pardon’( 미안합니다, 정도의 뜻으로 부딪힐 때 보통 쓰는 말)이란 말 외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그 ‘눈빛’에 대해 비난만 할 자격은 없다. 사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중국에서 우한의 아비규환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었을 그 당시, 지하철에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다가(프랑스의 지하철 출구 문은 매우 무거워 앞사람이 잡아주는 것이 보통 예의이다) 뒷사람과 손이 스친 적이 있다. 그 뒷사람은 동양여성이었고 나에게 메흐씨 ‘ Merci’ 라고 짧게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난 순간적으로 그가 중국인인지 의심이 들어 공포심이 들었다. (그 여성이 중국인인지, 베트남인인지, 대만인인지, 태국인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외모로 동양인의 국적을 구분 못하는 건 나도 똑같았다.)
내 눈빛이 슈퍼마켓에서 만났던 그 백인 여성과 비슷했는지 모르겠다. 근데 그 이후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심각한 불안감이 나를 둘러쌌었고, 집에 오자마자 손을 몇 번이고 씻었던 걸 보아, 내 눈빛도 비슷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눈빛은 전 세계에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무지’에서 온 두려움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아직도 하루에 만 명 넘게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이 이제 우리는 다른 인종인 서로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지금은 내 가족이 전염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소수의 인종차별주의적인 극단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코로나 초기처럼 심각했던 아시아인 혐오 분위기는 많이 없어졌다.)
또한 프랑스인 중에서도 그 코로나 초기에서도 내게 여전히 예의를 갖추고 친절했던 사람들도 많다. 우리 동네 슈퍼 직원들이나 약국 직원들은 모두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주었고, 특히 내 프랑스 친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고, 마스크를 쓰기 싫어하는 프랑스인들을 한탄하며, 한국의 높은 방역시스템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도대체 왜 프랑스인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아직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이제 열심히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프랑스인들을 보면서 ‘정보’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종일 어디서 누가 어떻게 감염되었지 보도해대는 정보의 홍수에서 사는 한국인들보다 감염경로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받을 수 없는 프랑스인들은 둔감했을 수도 있다.
코로나 상황 초기, 프랑스 복지부에서는 프랑스에는 감염에 대한 방어정책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으며 아무런 문제 또한 없을 거라고 매우 자신 있게 선언했다. 방송에서 너무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연설하던 보건복지부 관계자의 얼굴이 똑똑히 기억난다. 아픈 사람만 마스크를 쓰면 된다고 심지어 ‘의사’들도 조언하기도 했다.
마스크의 과학적 효과에 대해 하루 종일 토론만 하는 프랑스인들을 보며, 심적으로 정말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가 보편화되어있는 한국인들에 비해, 마스크는 죽을병이 아닌 이상, 테러범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내 프랑스인 친구는 프랑스인들은 마스크를 코로나 이후에 난생처음 껴본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 곳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특히 프랑스 정부에서도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기 위한 충분한 물량을 마련하느라 시간을 벌 궁리를 했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코로나는 다른 인종들과 함께 살아갈 때 ‘서로에 대한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민족 국가인 프랑스, 특히 프랑스인 무슬림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극단주의 이슬람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더욱더 이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다문화가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조만간 이 문제가 더 큰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더 심각한 내 민족중심주의로 가던지, 인류애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 대한 더 디테일한 고민이 시작되던지 이제 각 국가에서는(특히 다민족 국가에서는) 더욱더 극단적인 두 부류로 나뉠 것 같다. 지금 미국 사회가 가장 큰 예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현재 유럽에서 코로나가 심각하게 퍼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한국의 언론은 신이 난 듯 자극적 언어를 써가며 보도를 해대고 있다. 이제까지 계몽주의적 공중파 다큐에서 늘 우리가 배워가야 할 유럽 시스템을 열심히 설명하던 ‘유럽백인들’이 몰락해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걸 수도 있다.
물론 그 상대적 우월감을 가질 만큼 초반 대응을 한국이 잘 해내었고, 지금도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한국의 확진자수는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유럽을 그렇게 비난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매일 확진자가 몇만 명 이상이 나오고, 병원에서 코로나 중증환자들을 치료할 전문기기를 준비해놓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는 유럽의 의료시스템에 미리 우리가 갖춰야 할, 배워야 할 점은 없는지 언론들이 주목해줬으면 좋겠다.
프랑스는 코로나로 인해 지금 멈춰진 직종에 대해, 특히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분야(식당, 카페, 관광업, 항공업 등)의 관련 종사자(정규직, 계약직 외국인 상관없이)들의 기존 임금의 70% 이상을 보장해주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인 가이드와 식당업에서 종사하시는 분들도(정식으로 신고 후 매해 세금을 내오신 분들이다.) 또한 코로나 시작 이후, 또는 봉쇄로 인해 식당 문을 닫은 이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매달 받았다고 했다. 또한 부분 실업급여 시스템도 총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 1년이 넘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든 시기였다.
봉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극도의 공포심으로 프랑스인 모두가 집에 갇혀있을 때 우리 부부의 하루의 에너지를 유일하게 공급해주던 시간은 매일 저녁 8시 테라스에 나가 의료진을 위한 박수를 치던 때였다. 건너편 건물의 이웃들과 정말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꼬박꼬박 고개로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한국에서 살 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던 내가 인생에서 이렇게 매일 이웃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나 싶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자녀와 함께 테라스에 나와 언제나 우리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박수를 함께 쳤던 그 프랑스인(프랑스인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린 따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 부부에게 정말 감사를 전하고 싶다. 지금은 이사를 해서 그분들을 만날 수 없지만 그때 느낀 '사람의 온기'로 우리는 집에 갇혀 있을 동안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정말 우리 모두 너무 수고 많았다. 이 낯선 땅에서 코로나와 함께 1년을 버텨온 나와 내 남편, 그리고 이 시기를 버티고 있는 한국인들, 프랑스인들 우리 모두에게 토닥토닥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