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다시, 홀로 오롯하게 서있기를 바라는 마음
오늘의 목적지
런던 브리지 저 위쪽에 있는 Spitalfields Market
런던 시내에서 열리는 마켓이라 구경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거라는 착한 후배의 추천덕에 알게 된 곳.
같이 추천해준 Poppies의 피쉬앤칩스도 벌써부터 먹고 싶었고,
주위에 있는 Brick Lane Market, Vintage Market 덕에 구경할게 더 많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이 날 따라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더라
한창 아이템을 진열하느라 정신없는 2미터의 패셔너블한 흑인 형들
저런 니트 가디건에 줄무늬 양말까지
꽤 이른 시각에 방문했는데도, 대부분의 상점들이 장사 준비를 거의 다 끝마쳤고
시간이 갈수록 매력적인 영국 발음의 손님들이 서서히 가득 차,
오가는 목소리만으로도 활기찬 시장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심 속에 자리 잡은 덕분인지, 가게들이 둘러보기 좋게 모두 가지런히 서있었고
천장이며 바닥이며 깨끗한 시설들, 그 덕분에 풍기는 불쾌하지 않은 북적거림에 휩쓸려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시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사지도 않을 물건에 대해 괜히 몇 마디 물어보고
'이거 다른 색상은 없어요?'
'와 이거 진짜 마음에 드네요, 조금만 둘러보고 다시 꼭 올게요'
그렇게 나름 시장에 온 느낌을 한창 내다보니
문득 신촌역 지하의 상가들이 떠올랐다.
처음 지하철로 등교하며 복잡다난한 그곳을 헤매던 때에는,
머리띠나 귀걸이 같은 악세사리들을 팔고 있었기에 눈길이 많이 가지 않았다.
제대를 하고 나니 핸드폰 케이스나 가방들을 아무렇게나 잔뜩 늘어놓은 채 떨이처럼 싼 가격에 팔고 있었고,
얼마 지나선 찾아보기 힘든 줄 알았던 수입과자들을 천 원 단위 가격으로 잔뜩 내놓고 있더라.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철로 접어들자
영영 잘 될 것만 같던 수입과자도 물량이 다 떨어진 건지,
아니면 다들 그 달달함에 물린 탓인지,
난데없이 귀여운 작은 사이즈의 레고 블럭 캐릭터들을 팔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미 그 재미에 빠져들어 카페에 혼자 가서는 꼬부기며 파이리 같은 것들을
큰 손가락을 갖고 힘겹게 한 층씩 쌓아 올려 만들곤 했었다.
이제 와서 저렇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니,
무언가 억울하기도 하면서 새삼 반가운 기분
어렸을 적 레고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즈음엔가, 아직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던 때.
산타 할아버지가 레고를 한 꾸러미 주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으며 잠에 들었다.
그때의 어렴풋하지만 군데군데 또렷한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산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다부진 결심을 하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산타가 누군지 알 수 있겠다는 기대와,
만일 원치 않는 선물을 가져온다면 다른 것을 달라 부탁해야겠다는 소망을
따뜻한 이불과 함께 양손 가득 꼬옥 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머리를 눕히고 몸이 따스해지면,
노래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깊이 잠들어버리는 건 그때도 매한가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환한 형광등이 온 방을 비추고 있었고,
머리맡에는 웅장한 고성을 테마로 한 큼지막한 레고 박스가 바릇이 놓여있었다.
산타를 믿고, 산타에게 받았던 것에 대한 마지막 기억.
유감스럽게도 그 이전의 것들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고,
특히 그 이후에는 마치 권리라도 되는 양, 부모님께 원하는 선물을 당당히 요구했더라.
테이크 아웃 해갈 때와, 매장에 앉아서 먹을 때의 가격차이가 거의 2배 정도 난다.
왼쪽은 테이크 아웃 줄, 오른쪽은 매장 입장 줄
Cod가 일반적으로 먹는 대구
Haddock도 대구과의 생선이라고는 하는데 조금 다른가 보다
라지 사이즈 하나로 남자 둘이 먹기도 충분한 양
아침부터 바삐 돌아다닌 몸도 쉬어 줄 겸, 두 다리 쫙 펴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두리번두리번
딸 아이를 위해 종이봉투 속 감자튀김에 소금을 적당히 뿌린 뒤,
힘차게 흔들어 대던 자상한 아저씨의 미소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고 싶은 게 정말 많았지만
방금 피쉬앤칩스를 잔뜩 집어먹고 온 터라 포기
생각보다 너무 빈티지해서 금방 뛰쳐나온 Vintage Market
그렇게 규모가 크지도 않고 개인적으로는 볼거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나를 항상 지켜보는 미지의 존재 눈치를 봐가며,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며 침도 아무 데나 뱉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도와 드리고, 아무도 없다 해도 무단횡단을 하지 않으면서
일 년 중 단 하루의 그날 밤 하얀 눈이 가득 내리기를,
산타 할아버지가 실수로 내 방을 지나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는, 그리고 착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으시니까
그렇게 일 년 동안 반듯하게 길러낸 양심에 대한 보상을 받는 날이기에,
산타가 어른들의 거짓말로 비롯된 존재라는 것을 알아 챌 정도로 영악해진 순간
그와 동시에 산타의 선물을 받을 자격도 잃어버린다.
산타가 나의 아버지이며, 언제 어디에서고 나를 지켜보는 이는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 모든 일이 철저한 인과관계를 갖고 맞물려간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렇게 서서히 양심의 칼날은 무뎌져 가기 시작하기에.
여름이 벌써 지나가듯, 십이월도 금방이려나.
요즘 들어 매일을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를 칠백 자 혹은 천 자 내지로 찍어대고 있다 보니,
게슈탈트 붕괴마냥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의 혼란 마저 싹튼다.
지금껏 충분히 해보지 못한 자아성찰의 시간을 돈벌이를 앞두고 가져보자니 잘 될 턱이 있을까.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다들 나름의 모양과 색을 가진 블럭들을 차곡이 쌓아 올려 지금의 모습을 갖췄을 텐데
내 것이라 자랑스레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세상 기준에 맞추어져 있으니
다른 이의 블럭이 괜스레 탐이 나고 부러워진다.
그러고 보면 평생을 내 마음 가는 대로의 모습과 색으로 쌓아온 것들이니,
이미 거대한 성을 이룬 톱니바퀴에 끼워 맞추는 일이 쉬울리 없다.
단일 상품으로 팔려가선, 세트 상품 속에 묶이는 형국이 참 비극적이지만
언젠간 다시 홀로 오롯이 서있을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