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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트 Sep 23. 2017

영국이야기_11 / 브라이튼, Brighton

여운


아늑했던 호텔. 조식도 괜찮았다




아침 산책 시작







먼저 대학생이 되어버린 누나와, 아직 해야하는 공부가 산더미 같던 고등학교 2학년으로 남아 있었던 시절. 대학생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공부가 끝나고 즐겁기만한 자유가 잔뜩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지만, 그렇다고 누나가 딱히 부러운 적은 없었다. 



런던 아이 대신에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으며,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어느 날은 늦게 나가기도, 친구들과 맘 껏 술도 마시고.



부러워도 한참 부러워 마땅해야 할 것들이, 그 때의 나에게는 모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누나가 없는 학교 생활,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하는 한 두 판의 게임, 야자시간에 시켜먹는 닭꼬치. 그런 종류의 것들로도 충분히 나의 학창 시절이 즐거웠기 때문이며, 인정하기는 싫지만 의도적으로 부럽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에. 



요정도야




혼자서도 잘 하지요







그러다 딱 한 가지, 대학에 가게 된다면 저건 나도 꼭 따라 해봐야지 싶은 게 생겼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한 달 가량의 유럽여행. 



초등학교 시절 가족들과 한 번 가보고는 대부분 잊어버린터라 누나의 여행준비가 나에겐 뜨뜻미지근 하기만 했는데,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기 좋게 앨범으로 만들어 온 것을 보고 마음이 강하게 동하기 시작했다.



남자 둘, 여자 둘. 그렇게 네 명이서 떠난 유럽 여행의 면면은 자유로움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유럽 각지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들, 관광하러 나간 사이 호텔방에서 거금을 도둑맞은 사건, 현지인들과 친해진 이야기. 누나의 재잘거리는 설명에 힘 입어 내가 가지도 않은 그 여행은 더 실감나게 다가왔고, 이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해 입밖으로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 배낭여행'이라는 소망이 마음에 자리 잡은 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정신을 못차릴만큼 즐거운 것들과 해야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숙제들과 끝없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얼굴들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쯤, 간단한 통성명과 함께 갑작스런 포옹을 하던 이. 악수가 아닌 포옹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그때부터 무엇에 홀린 것 처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쫓아다님은 국경을 넘어 유럽에 이르렀다.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았기에, 먼저 걸어준 말 한마디와 먼저 잡아준 손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던가. 그 온기와 여운이 꽤 길었다. 들어온다 아무런 신호없이 자리잡고는, 하얗다 못해 텅 비어 있던 도화지에 형형색색의 물감을 칠했고,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여 열아홉까지의 스스로는 진작에 버리게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멍청한 짓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피가 섞인 이보다 더 아끼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 자체로 모든 이유를 대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데려다 주는 일은 행복한 일이라는 걸 배웠다.






브라이튼 피어로 들어가면 각종 놀이기구부터 오락시설까지 다 있다. 월미도 같기도 하고.



수심 가득한 표정



그러게 왜



물어버린당



일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두 권의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백 권이 될 줄 알았던 기대는 산산히 부서졌다. 같이 도착하리라 믿었던 끝에는 야속하게도 다른 시작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사회를 만들었던 이는 사라졌지만, 한 번 조성된 그 사회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생각하는 법, 좋아하는 법, 표현하는 법. 누군가를 향해 맞춤으로 만들어져버린 그 모든 기능들은 다른 사람에게 쉴 새 없이 부작용을 일으킴을 반복했다. 이성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해도 애초에 그런 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 모든 새로운 시작을 망쳐놓고선, 점점 흐려지는 그림을 덧칠하며 만족하는게 습관이 되었다. 



너 나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다고 해서 글이 써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뒤라 그때의 감정을 오롯이 지고 있던 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때 듣던 노래와 그 때 보던 풍경들로 귀와 눈을 가득 채운다 해도,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기에.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들이 너무나 후회된다.



나 나

지나보면 그 때의 순간적인 감정들이 소중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그래서 지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인데. 하염없이 멍청하여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기록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 음악 듣는 것 대신에, 잠자는 것 대신에, 쓸데 없는 티비 프로를 보는 것 대신에 손가락만 몇 번 더 놀렸다면 되었을 일을.



손가락은 꽤 이쁜 편인데












브라이튼의 바다를 따라 걷다 너무나 보기 좋은 부자를 발견했고



예쁘게 담아서는



선물해주었다









생각해보면 여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짙은 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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