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먼저 대학생이 되어버린 누나와, 아직 해야하는 공부가 산더미 같던 고등학교 2학년으로 남아 있었던 시절. 대학생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공부가 끝나고 즐겁기만한 자유가 잔뜩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지만, 그렇다고 누나가 딱히 부러운 적은 없었다.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으며,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어느 날은 늦게 나가기도, 친구들과 맘 껏 술도 마시고.
부러워도 한참 부러워 마땅해야 할 것들이, 그 때의 나에게는 모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누나가 없는 학교 생활,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하는 한 두 판의 게임, 야자시간에 시켜먹는 닭꼬치. 그런 종류의 것들로도 충분히 나의 학창 시절이 즐거웠기 때문이며, 인정하기는 싫지만 의도적으로 부럽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에.
그러다 딱 한 가지, 대학에 가게 된다면 저건 나도 꼭 따라 해봐야지 싶은 게 생겼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한 달 가량의 유럽여행.
초등학교 시절 가족들과 한 번 가보고는 대부분 잊어버린터라 누나의 여행준비가 나에겐 뜨뜻미지근 하기만 했는데,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기 좋게 앨범으로 만들어 온 것을 보고 마음이 강하게 동하기 시작했다.
남자 둘, 여자 둘. 그렇게 네 명이서 떠난 유럽 여행의 면면은 자유로움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유럽 각지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들, 관광하러 나간 사이 호텔방에서 거금을 도둑맞은 사건, 현지인들과 친해진 이야기. 누나의 재잘거리는 설명에 힘 입어 내가 가지도 않은 그 여행은 더 실감나게 다가왔고, 이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해 입밖으로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 배낭여행'이라는 소망이 마음에 자리 잡은 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정신을 못차릴만큼 즐거운 것들과 해야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숙제들과 끝없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얼굴들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쯤, 간단한 통성명과 함께 갑작스런 포옹을 하던 이. 악수가 아닌 포옹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그때부터 무엇에 홀린 것 처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쫓아다님은 국경을 넘어 유럽에 이르렀다.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았기에, 먼저 걸어준 말 한마디와 먼저 잡아준 손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던가. 그 온기와 여운이 꽤 길었다. 들어온다 아무런 신호없이 자리잡고는, 하얗다 못해 텅 비어 있던 도화지에 형형색색의 물감을 칠했고,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여 열아홉까지의 스스로는 진작에 버리게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멍청한 짓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피가 섞인 이보다 더 아끼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 자체로 모든 이유를 대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데려다 주는 일은 행복한 일이라는 걸 배웠다.
일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두 권의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백 권이 될 줄 알았던 기대는 산산히 부서졌다. 같이 도착하리라 믿었던 끝에는 야속하게도 다른 시작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사회를 만들었던 이는 사라졌지만, 한 번 조성된 그 사회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생각하는 법, 좋아하는 법, 표현하는 법. 누군가를 향해 맞춤으로 만들어져버린 그 모든 기능들은 다른 사람에게 쉴 새 없이 부작용을 일으킴을 반복했다. 이성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해도 애초에 그런 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 모든 새로운 시작을 망쳐놓고선, 점점 흐려지는 그림을 덧칠하며 만족하는게 습관이 되었다.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다고 해서 글이 써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뒤라 그때의 감정을 오롯이 지고 있던 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때 듣던 노래와 그 때 보던 풍경들로 귀와 눈을 가득 채운다 해도,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기에.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들이 너무나 후회된다.
지나보면 그 때의 순간적인 감정들이 소중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그래서 지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인데. 하염없이 멍청하여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기록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 음악 듣는 것 대신에, 잠자는 것 대신에, 쓸데 없는 티비 프로를 보는 것 대신에 손가락만 몇 번 더 놀렸다면 되었을 일을.
생각해보면 여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짙은 향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