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고 블라블라
이 책의 부제는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이고 부제가 곧 내용이다. SNS에서 표지와 책 소개를 그럭저럭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는데 회사에 와있길래 읽어볼 수 있었다. 출판사의 소개가 굉장히 절묘하다
[ 씨네필+히키코모리+언어 오타쿠, 전무후무한 돌연변이 ‘힙키코모리’가 등장하다 ]
일단은, 소설이라고 해도 과설정일만한 ‘특이한 사람의 특이한 삶’을 다룬 에세이인데 그런만큼(=실제 사람의 이야기인만큼)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볼만한 포인트들이 존재한다. 깊이 읽을만한 책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포인트들은 이 책을 계기로 한번쯤 갈무리해둘만하다.
1.히키코모리의 삶, 자유 =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에 서문만 잠깐 읽어봤던 <속물과 잉여>라는 책이 떠올랐다(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어봐야 할듯).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에토스를 '속물'과 '잉여'라는 키워드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 책이었다.
실은 ‘잉여’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오로지 한 가지 잣대로만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나고, 서로 한사코 연결되지 않고 멍하니 부유하며 증오만 쏟아놓는 세계 하에서는 기껏해야 ‘속물’ ‘혐오자’가 될 뿐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충분히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장 돈을 벌지 않는 시간에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제로’인 것은 사실일까? 낭비되는 그 막대한 시간들은?…
실제로 내게 있어 언론사 준비 기간은 가장 불안하면서도, 가장 (거의 난생 처음으로) ‘아무런 강박 없이’ 책과 영화를 잔뜩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원래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닌데, 집 근처에 영상자료원이 있는 독특한 상황이었고 영화가 상대적으로 조금 접근성이 높았던지라 언시를 준비하고 통시간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하루에 몇편씩 영화를 보러 다녔다. 이는 내가 했던 시험 준비가 특이하게도(PD 준비까지 대강 고려한다면) 영화, 책 등을 읽었을 때 ‘도움이 될만한(글감이 될만한)’ 준비였기 때문이기도 했긴 한데, 그것을 나중에 다시 보고 나서 나노단위로 분석하며 블로그에 길고 꼼꼼하게 감상을 올린 것들만 해도 시험을 보러 다니던 약 8개월동안 거의 100편 가까이 되었다. 아마도 평생 본 영화보다 그때 본 영화가 많을텐데, 그 당시에 영화를 보고 정리하고 (비평의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했던 일이 내 삶에서는 굉장히 재밌고 기쁜 일이었던 기억이다. 돈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호의, 즐거움으로 덕질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1-a.배부른 소리? = 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다. 실제로 20대에 어떤 직업을 갖지 않았을 때 그 여파가 미래까지 밀려나 ‘루저’가될 수 있다는 압박감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고…이 작가의 글에서는 자신의 집안 사정이나 가족, 경제력(그 동안에 혹시 돈을 벌었다면 어떤 알바를 했고) 등이 어떤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쓸데없는 일에 골몰할 수 있었던 저자에 대해 혹자는 ‘배부른 소리’라는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경우는 졸업 이후 어느정도는 [현실적으로] 돈을 막 당장 벌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긴 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도 솔직히 딱히 전혀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닌데 대체 얼마나 [내몰리고, 처참하고 극악한 상황]만을 상상해야 하는걸까? 그런 상황에서는 일체의 [즐거움]과 [안분지족]을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잘못인 걸까? 가난한 삶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가난함 자체를 ‘비참하고 나쁘게’만 보는 시선의 탓이 아닐까? 이 문제는 최근 <일터의 소로> 서평을 쓰면서도 생각했던 바이다. 가난함과 소속됨이 없음은 한편 자유로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은 오늘날엔 좌파적 관점이 모든 종류의 삶의 기쁨을 잃게 하고, 돈/물질 외에는 어떠한 즐거움도 얻지 못하게 하는 더욱 큰 원동력일지 모른다.
1-b.시간을 쓴다는 것 = 실은 시간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서처럼, 여가-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것은 단지 우리가 좀 더 편하게 휴식하고 놀고,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함께 어울리고, 무언가 돈과 관련 없는 것을 작당하고, 몰두해보고, 나아가 그것이 [정치적인] 움직임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여가(소외되지 않은 상태의, 자유로운 시간사용)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체제 전복 가능성, 더 나은 삶은 거창한 정당한 대의나 논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단지 ‘빈 시간’과 그것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에서 오는 것(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전복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적어도 이것이 없으면 전복의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전복적일 수 있는 ‘빈 시간’들은 오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죄수의 좌절감과 무력감, 혐오감, 증오에 휩싸여 딱딱하게 굳은 미라처럼 봉인되어 있다. 기껏해야 그런 삶의 결론은 정신병자이든, 범죄자가 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데, 좌파의 논리 역시 이에 포섭되어 있을 뿐이다. 이 시대는 가난을 벗어나는 것 말고도, [가난한 채로] 체제가 정해둔 금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깡그리 잊어가고 있다. 실은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 책에서 앞부분에만 잠깐 등장하는 ‘시네필 오타쿠’들의 생태계를 보면서는 <영화도둑일기>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들은 돈이나 명성과 관련없이 오로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자막을 달고 비평을 공유한다. 어쩌면 그 생태계에서 한껏 사랑과 열정을 나눈 경험이 그가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겠다(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에너지, 결심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도둑’은 영화를 훔칠 뿐 아니라, 이 경우에는 체제에 포섭된 시간사용방식 역시 ‘도둑질’한 것이다.
(36) 그때 나를 매료한 대상은, 남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기가 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에 영화 이야기를 마구마구 써대는 재야의 시네필들이었다. 온라인 세상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니 일본에 공개되지 않은 영화에 관해서도 글을 쓰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구작이나 신작이라는 구분도 없고, 국경조차 돈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글을 게걸스럽게 읽었고, 수십편이 넘는 작품을 감상하다가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근래 오랜만에 다시 읽었던 <경제적 공포>(비비안느 포레스테)에서 지나가듯 읽었던 한 대목이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실업 청년들의 ‘빈 시간’이 체제 전복의 기폭제일 수 있다는것이었다. 왜 오늘날엔 ‘잉여’가 ‘속물’에 포섭되는가? 꼭 전복이 아니더라도 혹은 세상을 좀 더 좋은 것, 재미난 시도, 엉뚱한 호의로 채울 수 있는 재료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사례처럼 말이다.
1-c.’다른 삶’의 실패가능성 = 실은 이 ‘실패가능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곰곰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정석적인 루트(서울에 집사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가족을 만들고, 재테크를 하고…)를 타게되면 전혀 실패하지 않는가? 오히려 이 정석적인 루트에 진입하는 것조차 굉장히 바늘구멍을 뚫어야하는 일이라 그 단계에서 이미 수많은 실패가 발생하고, 그 루트를 탄다고 해도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사회적으로 얘기되는 ‘성공’을 목표로하는 이들이 반드시 (그들이 목표하는 바의) 성공을 하는 경우도 없고 오히려 더 크게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성공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한창 때에’ 인생 사다리에서 과감하게 자기만의 길을 걸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게 과연 ‘실패’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미래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애초에 ‘실패가능성 없는 안정성’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그것이 이루어질지라도 기껏해야 사람을 먹고 싸고 노동하고 소비하는 지루한 부르주아로 만들 뿐이다.
2.텍스트힙 = 이 책에서 여러번 저자는 ‘멋져보이기 때문에’ ‘힙해보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왠지 멋있어보이고 변명거리도 됐기 때문이었고, 한때 순문학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장르문학보다 왠지 좀 멋있는 나’에 심취했기 때문이었고, 심지어 자신의 평생을(아마도) 바치기로 결정한 루마니아어의 경우에도 ‘마이너 언어에 심취한 나 멋져☆’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시를 처음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도 ‘오사레’한 취향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던 <블리치>의 권두 시를 통해서였다. 그는 스스로를 ‘블리치 세대 문학’이라고까지 말하는데, 이런 고백은 웬만해서는 (실제로 그와 비슷한 궤적을 통해 문학에 진입한 이들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부분을 솔직하게 말한다.
(38) 중고등학생 시절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소설로 예를 들면, 주변에서는 라이트노벨을 읽는데 나쓰메 소세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는 나, 대박 멋있다. 영화로 치면, 주변에서는 할리우드나 일본의 오락 영화를 보는데, 장뤼크고다르를 보는 나, 완전 힙하다…이런 자의식과잉은 결국 바보 취급을 받는다…그래도 나는 이런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자신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도 좋다고 본다. 이런 자의식을 사춘기의 방황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인생의 미학으로 키워가는 놈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나는 이런 독아론, 즉 하나뿐인 자기 자신을 끝끝내 파고들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나르시시즘에 인생을 걸었다. 그건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어에 인생을 거는 것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결과적으로] 루마니아의 사람들과 연결되고, 진지한 관심을 갖고, 루마니아어로 소설까지 쓰게 되며 그 나라의 역사에도 유의미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아직까진 그의 글과 관심을 구하는 성격이 다소 경박해보이는 부분은 없잖다.(애초에 루마니아에서 그가 갖는 관심은 어느정도, 단지 그가 그것을 ‘했기’ 때문에 받는, 독특한 것을 향한 호기심에 가까울 것이다. 앞으로 진지한 관심을 받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기껏해야 아직 서른이고 ‘루마니아어로 문학을 쓴지 불과 몇년 되지 않은’ 사람이다. 앞으로 그는 더 많은 것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저러한 부박한 관심들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꽃피고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다.
3.이중언어 사용자 = 이 책에서 뒷부분에 그렇게 길진 않게 나오는 대목인데, 이 부분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흥미롭다. 하지만 예상 가능하지만 이중(다중)언어의 섬세한 사용자들의 이야기는 항상 여러번 들어도 흥미로운데, 왜냐면 어떤 언어들이 화자의 개성에 따라도 어떻게 교차하는지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빛이 어떻게 들어오느냐에 따라 보석의 굴곡마다 다른 색깔이 쏟아지듯 말이다.
또한 ‘일본어 사용’과 관련해서는 마지막에 등장한 ‘오레’의 고의적인 사용도 꽤 흥미로운데,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에.
4.오레俺-나르시시즘 = 그는 이 책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의 답답함이나 바닥인 자존감 등에 대해서는 거의 이 책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짧게 적는데, 그가 일부러 이 에세이를 쓰면서는 ‘오레’라는 1인칭을 썼다는 선택의 경로(이유)가 흥미로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통상 히키코모리들은 자존감은 바닥이지만 자존심이 높아 위험한 상태다. 이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폭력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높은 상황 자체-나르시시즘은 그의 인격의 일부이며, 부러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1인칭을 선언하듯 사용함으로써 그가 어느정도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넘어섰다는 표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과거 우연히 국내 은둔형외톨이 자조모임 중 한 여성이 쓴 에세이를 읽은 경험이 있다. 그는 긴 직선그래프를 그려 자신의 생애를 도표화하고 있었는데, 수많은 일-주로 단기아르바이트를 시도했지만 그는 대체로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떨어져나와야 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대체로 ‘지나치게 밤에 일을 하다보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이 너무 지루해서 전혀 성취감을 얻을 수 없어 눈물이 났다’ ‘손님들이 함부로 대해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다’ 등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봤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배부른 소리하네’ ‘나약하군’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나는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그저 감내하는 것-자신이 소외되는 상황을 최대한 감내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라면, 그건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히키코모리들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은 문제일까? 오히려 그들은 세상의 독소에 물들기엔 지나치게 예민한, 새장 속 카나리아같은, 바틀비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그 나르시시즘이 건강한 상태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 혼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존경받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르시시즘이 다치지 않는 한에서, 어떻게해서든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각자가 발굴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흔히 손가락질하듯, 나르시시즘을 포기할 일이 아니라. (다만 사족이지만, 한국어 역시 루마니아어처럼 일인칭이 다채롭지 않은 언어라 ‘오레’라는 표현을 썼다는 걸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는 점. 아마 일본어 사용자들은 초반부터 읽는 내내, ‘얜 뭐지? 너 뭐 돼?’라는 느낌을 나보다 강하게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248) 히키코모리니까 시건방진 것이다 이유가 뭘까. 우리 히키코모리는 자기 긍정감이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다. 이 완벽하게 절망적인 상황을 견뎌야 하니까 반면에 자존심은 하늘보다 높은 곳에 있다.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지구를 뚫고 나갈 정도다. 그렇지 않으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강력한 에고이즘이나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자기긍정감과 자존심의 너무 큰 격차를 위험하다고 여기기에 어떻게든 고치려고 했다. 그러면서 셀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거기에서 오는 공허감에 짓눌렸을 때 나타난 것이 ‘오레’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아예 받아들이면 어떨까?
나르시시즘은 ‘자기애’라는 뜻이다…한번은 당당하게 나를 사랑해보자. 그러니 당당하게 나를 ‘오레’라고 해보자! 이렇게 해서 ‘오레! 오레! 오레!’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책이 만들어졌다.
5.화면은 어떻게 그를 구원하였는가 = 사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실제로 그쪽으로 다루려고도 막연히 생각을 해봤었고) 책 한 권이 ‘인터넷/SNS로 어떻게 유령이 이렇게까지 뻗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굉장히 벅차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인터넷을 제대로 사용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표지에 나왔듯 정말로 ‘유령’같은 존재고, 실제로 루마니아의 한 유명한 문학평론가는 그를 두고 “복잡한 인터넷 밈”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는 직접 루마니아에 갈 수도 없었고(재력, 건강 상의 문제 등으로) 오직 거의 모든 소개와 출판, 편집자와의 대화, 번역에 대한 상담, 교류 등을 99% 페이스북 등 SNS 메시지를 통해 진행했다. 그는 페이스북으로 무작정 루마니아 계정들을 팔로우하며 그들에게 친구를 요청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큰 도움과 기회들을 주었다.
그는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쓸 정도지만, 일상회화는 여전히 루마니아어가 서툴러서 영어로 이야기하는 편이고, 오랜 히키코모리 생활도 있다보니 직접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타자로 이야기하는 것을 훨씬 편하게 여긴다. 그가 루마니아어를 배우고, 루마니아의 누군가와 연결되고, 직접 그것이 실질적인 기회로 연결되는 것 자체가 마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빛나는 가능성의 인터넷 시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여전히] 개인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SNS는 혐오와 쇼츠, 광고의 지옥불이 아니라 말도안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공간을 점점 점유하고 자기 멋대로 적극 활용하려는 ‘욕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 그리고 명백하게도, 그의 ‘욕망’의 시초는 SNS를 멍하니 돌아다니다가 나온 것이 아니라 ‘잘 만든 루마니아 영화’를 보면서 나왔다. 이는 아래와 연결된다.
6.읽고-쓰기의 힘 = 이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자신이 읽은 책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맹렬하게 하루에 두세권씩 책을 읽어갔고 독서노트를 만들어 천권이 넘는 책을 읽고 직접 노트를 적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책의 양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순간에 터져나오는 저런 종류의 ‘읽기’에의 욕망은 분명히 기이한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책을 1년에 두세권만 읽는 쪽이 더 힘들다고 말이다(업무 관련 책 제외). 적어도 내 경우 삶을 되돌아볼 때 책을 1년에 거의 안 읽거나 혹은 거의 매일같이 맹렬하게 책을 보거나 all or nothing이었다. 저자 역시 과거엔 책을 읽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한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자 닥치는대로 문학 뿐 아니라 과학서적까지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읽기’의 힘은 여전히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어떤 무한한 선의와도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을 읽으면, 반드시 그 안에 돈과 관계없이 자신의 진정성을 쏟아넣은 누군가의 선의가 느껴지고 - 거기서부터 (꼭 그 책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거나, 거기서부터 무언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질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어쩌면 ‘첫책’을 ‘진짜로’ 읽게 하는 영업과 환대의 움직임이 계속 필요한 것인데, 그쪽의 이야기들이 계속 쏟아져나오면 그 이후로는 스스로 물을 뿜어올리고 물레방아를 계속해서 굴리게 된다.
결국 책은 선의와 관련된 문제다. 오늘날 책을 안읽는 이들이 ‘선의’에 목말라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반대로 자신에게 과하게 친절하고 잘해주고 바보스러울만큼 전심으로 뭔가 골몰해 있는 사람을 보면 깜짝 놀라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상냥해지기도 한다. 좋은 책을 읽을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에서도 그런 글들을 더 많이 보길 원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글들은 종이책에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냥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다. 예를 들면 이책을 만난 것 역시 내겐 그런 종류의 많은 기분 좋은 경험 중 하나였다. 이런 만남은 내가 루마니아어에 관심이 있어서도, 표지에 그려진 유령 그림이 힙하다고 생각해서도, 이중언어 소설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 그중 하나였어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다. 좋은 사람은 어떻게 만나든지 그 계기와는 별개로 그냥 좋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