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만 돌리면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일 년 여를 보내다 보니 바다에 대한 감흥이 조금은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지형이나 주변 건물들이 주는 다소간의 분위기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새 이 바다가 그 바다 같고 또 그 바다가 저 바다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다가 지천인 제주에 도착한 순간, 나는 아무런 기대도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아, 또 바다다, 할 뿐이었다.
짧게 제주도에 다녀왔다. 친구를 보러 갈 핑계 삼아 조용히 생각정리도 하고 올 심산이었다. 사실 제주도는 여러 번 가봤기에 큰 계획이나 기대 없이 그저 하루는 자유롭게 발길 닿는 대로, 하루는 마음 맞는 대로 움직일 요량으로 비행기표만 끊어서 훌쩍 떠났다.
제주도에서 렌트카 없이 여행한 건 또 처음이라서 막상 어디로 움직일지 막막했다. 멀리 이동하기에는 돌아오는 길이 아득해서 지도를 켜 친구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인 이호테우 해변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이호테우 해변을 지나가면서만 봤지 실제 두 발로 걸어본 기억은 없어서 그런대로 의미를 두고 돌아보기로 했다.
이호테우 해변가는 노을이 예뻤다
시간이 애매해서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에 가져간 책을 뒤적이다 보니 해가 졌다. 그래도 관광지라 그런지 혼자 온 손님이 없어 마침 연락 온 친구들에게 '야 제주도 왔다!'라고 하니 누구랑 간 것이냐며 폭풍 질문이 쏟아졌다.
- 혼자, 그래 남자 없이 혼자! 게하 아니고 그냥 친구집에서 잘 거고 친구는 당연히 여자야.
연애세포가 죽어버린 탓도 있겠지만 '이 나이에혼자' 여행하는 것을 죄악시하길래 조금은 피곤해져 대화방 알림을 무음으로 살짝 바꿔두었다. 마침 배도 고프고 해서 이번 제주여행에서 유일하게 목표로 한 고등어회를 먹으러 근처 횟집을 찾았다.
회는 또 무지하게 좋아해요
맛있었으니깐 두 번 보세요
친구가 예전에 추천한 도민맛집을 지도에 잘 저장해 둔 덕에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고등어회와 한라산 한 병을 주문했다. 고백하지만 식당에서 혼자 소주, 사실 처음이었다. 등이 유난히 푸르른 점박이 고등어 한 접시와 언제 리뉴얼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한라산 한 병이 내어졌다. 창 밖은 이미 해가 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검은 바다를 벗 삼아 천천히 회 한 접시와 한라산 한 병을 깔끔히 비웠다. 혼자 아무런 말도 없이 외딴곳 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니 어쩐지 어른이 된 것만 같기도 하고 청승맞아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조금은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네이버지도를 켜니 근처에 꽤 핫한 LP바 라는 것이 있어 검은 바다를 따라 5분남짓 걸어갔다. 2차를 혼자, 역시 처음이었다. 지인들이 부산에 있는 LP바나 위스키바를 제법 추천해 주었지만 첫 LP바의 순간을 제주에서 맞이했다. 어둑어둑한 LP바에 무려 10분 남짓 대기까지 하며 들어가니 음악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행히 혼자인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나는 또 소파자리에 안내를 받아 한쪽에는 커플이 앉아 꽁냥꽁냥 대는 가죽소파 한켠에 앉아 스피커와 그 너머 창 밖의 검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도음악상가'라는 곳입니다~!
제법 고독했으나 또 소리가 크니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많지는 않았다. 그냥 그냥 이렇게 흘러간 한 해를 생각했고 낮에 오면 바다가 배경이었겠구나 생각했고 지나간 인연들을 생각했다. 아주 가끔씩 '혹시 내 인생도 트루먼쇼가 아닐까?' 상상하곤 하는데, 나의 트루먼쇼에 왜 이 장면이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부산살이와, 조금은 더 가벼워진 발걸음에 여기저기 이곳 제주까지 다다른 나의 인생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나,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그러다 최백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가사를 못 알아듣다가 '달맞이고개' '부산역' 따위가 들려 검색을 해보니 노래 제목이 무려 [부산에 가면]이었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에 가사를 띄우고, 어디서 본 건 있어 위스키 한 잔에 노래를 찬찬히 음미했다. 노래는 (아마도) 부산에 남은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부산에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냐고 지나간 인연을 먹먹하게 노래했다. 제주도에 와서 감흥 없이 널리고 널린 바다를 보다가 부산 노래를 들으니 또 눈앞의 이 바다가 조금은 달리 느껴졌다. 왜 항상 처음은 너무 벅차고 가슴 뛰는데 시간이 지나고 일상이 되면 마음이 무뎌지고 말까. 매일 보는 바다 매일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특별하지 않은 게 아니고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닌데, 이렇게 아주 조금의 쉼표 끝에 돌아보면 어제와 오늘이 또 달리 느껴지는데, 나는 지겨워하고 말았을까.
노래 한 곡에 조금은 취했는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조용히 친구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시끌벅적 잘 짜인 여행만 하다가 기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그것도 홀로 움직여본다. 혼자임에 예전 같았으면 외로워했을(그래서 못 견뎠을) 순간에, 대신 고독함과 약간의 그리움을 느낀다. 양 손 가득 잔뜩 힘을 주고 살았더라면 이제는 꽤 차분하게 여유를 느끼며 지내는 듯해서바다를 보며 견뎌낸 일 년 끝에 미미하게나마 철든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