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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Oct 13. 2022

뜻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념일 뿐인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때로 거칠고 빠르게, 때로 느리고 잔잔하게 온갖 곳을 지나쳐 왔다.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보면 이 몸은 의지라고는 없이 물살에 떠밀려 급히 헤쳐 온 것만 같다. 인생은 여행, 여행은 인생과도 같다는 그런 진부한 말이 그래도 일리는 있는 것이다. 모두 경유지일 뿐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상은 변함없을 거라고, 머무는 자리도, 마주하는 사람도 늘 뻔할 거라고 단단히 오해했다. 지금에 이르니 오히려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지속적인 흐름이, 변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가항력이었다. 변덕쟁이처럼 변화하면 익숙하던 것들이 그립고, 익숙해지면 나날이 지루해서 떠나기만을 고대했다.

  지나온 모든 인생길이 여행이었고, 추억이 되었다. 맞닥뜨린 길마다 낯설었고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했다. 모든 선택이 충동적이었고 어설펐다. 그런 내가 못 미더워 자주 뒤돌아본다. 어쩔 땐 너무 빨라서, 어쩔 땐 마냥 고인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감상에 하염없이 젖어 들어 우울해지는 기분을 즐기곤 한다. 가끔씩은 일부러, 가끔씩은 예기치 않은 순간, 어느 한때를 상기하게 된다. 다른 장소, 다른 시기임에도 너무나 잘 아는 공기가 스친다. 심장의 혈관이 꽉 조였다가 일시에 풀린 듯이 어떤 기운에 나른한 회상이 감돈다. 주로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아서 걸음걸음 그 많은 걱정들을 흘리고 다니던 날들이 되돌아왔다. 대학을 다니던 청주는 찬바람이 많이 불었다. 아침이면 시외버스에서 내리는 가경터미널부터 몸을 부둥켜 안 듯 팔짱을 껴서 옷을 단단히 여몄다. 졸업할 때까지 낯섦이 가시지 않던 그 동네를 수심 많은 얼굴로 누비던 어린 청년이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는 일도, 다니지 않는 일도, 다가오는 졸업도 내키는 바가 아니라 어렵기만 했다. 고등학교를 끝으로 꿈처럼 사라질 학창 시절이 벌써부터 애틋해서 빈 교실을 둘러보며 대학 진학 상담 순번을 기다리던 날도 떠오른다. 라디에이터 근처에 서서 매일 바라보던 창밖 풍경과 내 자리, 친구들의 자리를 차례로 눈여겨보고 우리의 소리와 분위기와 냄새를 기억했다. 진로상담보다 내게는 그런 게 더 중요해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떠나보내는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해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하고 많은 기억들 중에서도 하교시간에 맞춰 함께 귀가하러 온 여동생을 먼저 돌려보낸 날은 유난히 마음이 아리다. 너무 오래 기다리는 동생이 안쓰러워 집으로 보내 놓고 창가로 달려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열두 살짜리 언니는 주룩 흘러나온 콧물을 조용히 소매로 닦아냈다.

  그런 일들이 아마 저 멀리 어느 시공간에서 벌어졌었고 이제는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있다. 또 새로운 일들이 이후로도 자꾸만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처럼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고 정신을 잃게도 했다.

  코로나가 한창인 무더운 여름, 젊음을 핑계 삼아 지인들과 캠핑을 떠났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자마자 짐을 챙겼고 코로나 범유행과 별개로 캠핑장은 사람들로 우글댔다. 구름이 끼어 별도 보지 못한 채 새벽녘에야 늦은 잠을 청하고 이른 아침 일어났다. 밤에 보지 못한 계곡물을 보러 홀로 강가로 갔다. 한 아이가 몰래 뒤를 쫓아와 “왁!” 하고 놀라게 했다. 같이 둑에서 내려와 강물에 발을 담갔다. 중류쯤인 계곡물은 며칠 전 내린 비로 많이 불어났고 물살이 셌다. “물이 엄청 차요, 누나!” 차갑고 얕지 않고 빠르게 흐르는 물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강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뜻 모를 나날에 함부로 뜻을 갖다 붙이지 않기로 했다. 결국 다 지난 일이 될 뿐이었다. 그저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만 남길뿐인 과거이다. 떠밀려온 지금, 나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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