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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Jan 22. 2024

구체화

  10대가 끝나고 궁금했던 수많은 미스터리 중 하나를 풀었다. 대학이 정해졌으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어느 대학을 나온 아무개로 살아가게 될 거였다. 그즈음에는 누구에게나 내 이름보다, 다니는 고교보다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어느 대학교 학생인지만 답하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가 대학교 타이틀로 이름 지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을 떠올릴 때면 어느 대학 나온 누구라는 생각이 곧장 든다.

  20대가 끝나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미스터리를 또 하나 풀게 되었다. 직장이란 게 그랬다. 전문직종 외에는 대부분이 월급쟁이 신세지만 월급쟁이도 나름 차이가 컸다. 공무원, 회사원, 전문직, 자영업, 단순노무 등등 다양한 직종 중 한 가지 역할을 가지게 되는데 대학 타이틀보다 더 강력한 이미지를 사람에게 심어주었다. 무슨 일을 하는 누구, 얼마를 버는 누구라는 식으로 머리 위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어느 대학을 나와서 무슨 일을 하고 얼마를 버는 아무개로 인지했다. 그리고 선이란 걸 슬슬 보게 되면 이제 상대에게 전해지는 내 인적정보는 이름, 나이, 직업, 이 세 가지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30대를 살아가던 와중, 불현듯 오늘은 인생이 서서히 구체화되어 감을 느꼈다. 마침표를 찍기엔 물론 시기상조인 이야기지만 그래도 밑그림뿐이던 그림에 윤곽이 선명해져서 지우고 새로 그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우스운 생각일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동안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게 맞는 생각인지는 모른다. 조금 틀린 생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분명하게 그리고 있는 그림, 내가 그린 것은 아니지만 또 나에게서 나온 그림이니까 '나의 그림'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연대기에서 점점 확연해지는 미스터리의 답은 단순히 '어디서 무얼 하는 어떤 인간'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정말로 보게 된 것은 나란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나의 본모습을 구체적으로, 입체적으로 알게 되고 있다. 그러니까 궁금했지만 또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던 미래의 내 모습이나 생활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내 관심사는 전자에 훨씬 몰려있었다. 어느 대학엘 갈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얼마나 벌게 될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따위가 늘 궁금했고 알고 싶어서 조급했다. 그런데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 때마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풀게 된 것 같은 허무함이 있었다.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그토록 알고 싶었던 내용물 자체에는 사실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드는 허무감이었다. 중요한 어떻게 향유하는가, 말하자면 어떻게 누리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였고, 그보다 더한 핵심은 나란 인간의 본질을 알아보는 눈을 뜨는 거였다.

  10대의 나는 자만했다. 20대는 그 자만의 끝을 보았고 후반에 가서는 쓰라리게 깨달았다. 자만했던 내가 얼마나 잘못 가고 있었는지를. 그러나 30대가 되어서도 쉽게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실 흔하디 흔한 갑남을녀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진부한 걸 혐오하지만 가장 진부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객관화를 못한다는 것을, 바닥이라는 것을. 알수록 마음은 편안해졌다. 오늘은 대화 중에 언니가 강설시간에 들었다며 그런 얘기를 해줬다. 사람의 의를 바라보면 상대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되고,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는 말씀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 같다. 내 안에 의가 없고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할수록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자만심은 큰 병인데, 이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해서 자꾸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점수를 깎아버리고 싫어하고 취급을 안 한다. 자만하기 때문에 너그럽지 못하고 사랑을 받거나 주지를 못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데 자연스럽게 그럴 만한 때가 찾아온다.

  이제는 자만심을 놓아주고 또 멀리 보내줘야 한다. 때를 놓치고 자기 연민으로 그러쥐고 있지 말아야 한다. 성화라는 것은 이처럼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누려가는 것이 아닐까?

  30대가 끝나면 또 어떤 미스터리를 풀고, 또 어떤 구체적인 현실에 놓이게 될까? 지금도 몰라서 뭉뚱그려 부르는 나의 또 다른 부족은 무엇이며 어떻게 부인해 갈지, 앞으로는 그것이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의 기도와 말씀 묵상과 감사하는 마음, 뉘우침은 필수불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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