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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Mar 29. 2024

목소리는 곧 권력, <댓글부대>

<댓글부대> 영화리뷰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은 세상에 실재한다. 작은 사회부터 큰 사회까지 이 법칙은 분명히 통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라는 건 사람에게 신뢰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일단 큰 목소리로 힘을 과시하면 거기 속한 사람들은 큰 목소리를 따르게 되는데, 무언가를 따르는 것에는 자기의 권한을 일정 부분 혹은, 많은 부분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람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더욱 힘이 커지면 '목소리 큰 놈'은 행동 범위를 넓혀가고 사회에서는 자주 그를 용인해 주게 된다. 힘에 굴복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법칙을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단조로운 세상에 돌멩이를 던지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사회 고발자들이다. 사회 고발자들은 목소리를 크게 낼 힘은 없지만 적당한 사운드로 속삭여서 들어보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말이 가진 힘을 대책 없이 좇는 습성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손석구가 연기한 임상진 기자는 작은 목소리의 힘으로 '목소리 큰 놈'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려는 인물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국내영화가 버리지 못하는 고질병 중 하나인 자막설명으로 여기서 다루는 사건이 실화임을 밝힌다. 영화가 실화 기반임을 설명하는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이제는 고안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일순 스친다. 동시에 또 굉장히 열받는 일이 앞으로 펼쳐지겠군, 하는 예상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댓글부대>는 시종일관 진실과 거짓의 양대산맥이 몸싸움을 벌인다. 대체로는 거짓의 힘이 우세했고 영화 말미까지 보아서는 거짓이 판정승을 받고도 남았을 거란 추측을 하게 한다.

  네이버 영화에서는 임상진 기자를 실력은 있지만 허세가 가득한 사회부 기자로 설명하는데, 참 이상한 캐릭터 설명이었다. 영화 속 임상진 기자는 진짜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 고발 정신 투철한 사회부 기자였다. 나머지 인물들은 임상진 기자를 받쳐주는 정도의 캐릭터여서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임상진 기자' 하나로 볼 수 있었다.

  '목소리 큰 놈'의 정체는 주요 사건 세 가지로 세상에 폭로된다. 첫 번째 사건은 이 놈이 인터넷을 민영화해서 유료화시킨 장본인이자 매번 이런 방식으로 시장을 통째로 장악하는 한국 초거대기업이란 사실을 폭로한다. 이 놈이 통신선을 몽땅 사들이지 않았으면 이렇게 비싼 요금에 기간제 계약까지 해가며 인터넷을 쓰지 않았어도 됐을 뻔했다니 여기서부터 열이 뻗치기 시작한다. 뭐든지 통째로 사들여서 내수 시장을 온통 자기네 기업으로 도배질하는 만행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손에 피를 묻히며 잔인무도하고 악랄하게 지속해 갔다. 어쩐지 한국에 남은 휴대폰 생산 기업은 하나뿐이더라니.

  이 기업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값어치를 하는 브랜드를 가졌다. 그런 만큼 이미지 실추란 예외 없이 싹을 잘라줘야 하는데, 다행히도 자기들의 부도덕한 악행을 감추고 세간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에는 도가 튼 전문가였다. 두 번째 사건에서 그 사실이 폭로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주장하며 홀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 신기록을 경신하던 한 남자는 이 기업의 술수로 가정이 완전히 붕괴된다. 기업은 자기 몸뚱이를 불리는 일에만 급급해 너무 많은 사고를 쳤고 아마도 이 힘없는 남자의 1인 시위가 자기가 저지른 수많은 사고 중 하나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상진 기자는 큰 목소리로 진실을 가리려는 기업의 악행을 하나라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거짓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첫 번째 사건에서 진실과 거짓의 힘 겨루기 결과는 거짓의 승리였다. 이 사건으로 임상진 기자가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내몰렸고 실직을 하게 된다. 세상은 큰 목소리로 떠드는 말을 더 믿어주었다. 임상진 기자가 밝혀낸 기업의 악행은 거짓 뒤에 감춰져 버리고 만다. 두 번째 사건에서도 사람들은 오로지 자극적인 이슈에만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라는 더 중요한 이슈는 묻히게 된다. 이 사건이 제대로 다뤄졌더라면 힘만 믿고 설치는 기업이 그 힘을 악용해 온 죗값을 조금이나마 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이 기업이 유리한 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목소리'라는 권력을 쥐고 있음이 마지막 사건에서 폭로된다. 여론은 언제나 목소리 큰 자를 따르게 마련인지라 여기서 가장 큰 확성기를 손에 쥐는 게 관건이었다. 기업은 댓글부대라는 용병을 몽땅 사들인다. 그러니까 곧 여론 그 자체를 사들이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목소리마저 돈을 주고 사버렸으니 그 누구도 진실의 소리를 듣기는 어려워졌다.

  말의 힘을 좇는 임상진 기자는 계속해서 고군분투한다. 그가 작게 속삭이는 진실의 소리에 언젠가는 세상이 반응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미 이 세상은 '목소리 큰 놈이 이겨버린' 세상이지만, 그래서 더는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수조차 없는 형국이지만, 진실된 폭로는 그치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던지며 영화가 끝난다.


  최근 개봉한 영화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스토리를 적을 순 없지만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다 전했다. 영화적으로 아쉬운 면이 있다면, 영화라면 무엇이든 장면으로 이해시켜야 하는데 활자가 너무 많았다는 점이 있고, 신선한 얼굴들이 배우로 나와 새로운 연기를 보는 건 즐거웠지만 흡사 청춘영화를 보는 것 같아 장르가 약간 모호해졌다. 또 손석구의 연기는 언제나 좋아하지만 그 특유의 나른하고 일상적인 여유로운 모습 때문에 오히려 텐션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악역으로 분했다면 그런 예상치 못한 모습에서 상상력을 돋궈 캐릭터에 긴장감이 가미되겠지만 <댓글부대>에서의 손석구는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로서 자세라든지, 말투라든지 좀 더 빠른 템포로 연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워낙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 매력 있는 배우라서 좋은데, 이번 캐릭터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이 어울렸을 것 같다. 각본도 끝맺음이 아쉬웠다. 사실이야 어쨌든 시원한 한방을 기대한 관객들로서는 맥이 빠지는 결말이었다. 영상미, 배역, 새로운 배우들의 얼굴 합, 음악, 속도감은 신선하고 보는 맛이 있었다. 거짓을 상징하는 놀이공원 배경 장면에서는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가 연상되었는데, 나름 노린 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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