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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Oct 01. 2024

자백의 늪 ② 검거작전


<① 2004년 괴담>에서 이어집니다.



5번방 남자는 상대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요” 이병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 순간 이진구가 뛰어나왔다. 


“야! 경찰 왔냐? 사이렌 소리 들리던데”


어디선가 들린 사이렌 소리에 전당포의 금품을 담다 말고 헐레벌떡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둘은 계단을 따라 달려 내려갔다. 


5번방 남자는 운이 좋았다.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즉시 신고를 했다. 이 살인사건에 관한 최초의 신고였다.



이진구와 이병주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건물 출구로 나갔는데 경찰은커녕 관심 갖는 행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렀고 자신들의 모습을 본 목격자들도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미처 다 챙겨 오지 못한 전당포 귀금속들이 아쉬웠다. 이진구가 잠시 고민하다 외쳤다. “죽인 건 죽인 거고 챙길 건 챙겨야 할 거 아냐?”


그래서 그 둘은 다시 뛰어 올라갔다.


전당포를 뒤져 몇 개의 금고 열쇠를 찾아냈다. 사람들이 맡겨놓은 롤렉스 시계, 금불상, 진주목걸이 등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쓸어 담았다. 당시 돈으로 1500만 원 정도의 금품이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모습


여유 있는 도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종종 명석한 살인범이 증거를 완벽히 인멸하고 수사기관과 두뇌게임을 벌이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현실에서 여러 살인사건을 취재하며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특히 2004년에는 더욱 드물었다. 시신이나 발자국 등 명백한 증거가 남아있어도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이병주나 이진구도 굳이 현장을 정리하고 목격자의 입단속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저 얼른 돈 되는 물건들을 털어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5번방 문을 붙잡고 공포에 떨던 이십 대 초반의 커플에겐 그런 상황이 특별한 행운이었다.



그렇게 두 구의 시신과 목격자를 남겨두고 이병주와 이진구는 도주했다. 하지만 범죄자가 사라져도 현장에는 범행의 흔적이 남는다.


경찰은 용의자가 남긴 시그니처를 통해 범죄심리를 분석한다. 한 사람의 범행에서는 비슷한 행동 패턴이 발견되기에 이를 통해 단서를 찾는 것이다.


이병주와 이진구의 범행 특성은 거의 비슷했다. 특히 많은 사건기록이 남아있는 이병주는 ‘무질서’하고 ‘비체계적’이라는 것이 범행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한 마디로, 범행 현장마다 엉망진창이라는 게 시그니처라는 뜻이다.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상대를 빠르게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도 없이 상대가 기력을 잃을 때까지 난도질을 한다. 그러고는 저것이 망자의 목숨값이었나 한탄하게 하는, 적게는 몇십만 원 정도의 금품을 훔치거나 그마저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사라진다. 


굳이 찾자면 이것이 이병주의 시그니처였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이런 난도질을 보통 오버킬이라고 표현한다. 피해자의 목숨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전신에 칼로 자창(찌르고)이나 절창(베는)을 수십 개씩 과도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흔히 오버킬 범행에서는 범인의 강력한 살의를 읽는다. 상대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극단적인 원한, 증오나 혐오, 감정적인 폭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병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오버킬을 했다. 


이병주는 약에 취한 오버킬이었다. 범행을 할 때 거의 필로폰 투약 상태였고, 팽팽한 긴장감은 환청이나 망상을 불러왔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하지 않은 말을 듣고서는 자기를 공격했다며 칼을 휘두르고, 죽었는데도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계속해서 난도질을 한 것이다.


취재 중 입수한 이병주의 정신과 진단서 (2004년)


이들의 무질서한 범행에 경찰도 혼란에 빠져버렸다.


이병주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담당한 수사관들은 시신에 남은 오버킬 흔적을 보고 자연스레 범인이 격앙된 감정으로 피해자들을 죽였을 거라 추정했다. 그래서 피해자 주변에 돈이나 치정 관계로 얽혀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용의 선상에 올렸다.


결국 경찰은 이병주나 이진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심지어 방이동, 석촌동 두 사건이 가까이에서 벌어졌는데도 유사성을 검토하거나 사건을 통합하지도 못했다. 그해 서울에서 워낙 살인사건이 많이 벌어지니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한 점과 다른 점을 잇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석촌동 살인사건도 앞선 방이동 50대 여성 살인사건처럼 미궁에 묻혀버렸다. 


피 묻은 수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 특징 중에 ‘능숙한 말솜씨’나 ‘화려한 옷차림’ 등이 있다. 


이들은 사람들을 속여 환심을 사고 자기 목적대로 조종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진구가 전형적으로 그런 캐릭터였다. 이진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옷을 잘 차려입고 말솜씨도 좋고 심지어 춤도 잘 췄다고 기억한다.


그런 이진구가 동대문의 한 상점에서 100만 원권 수표를 내고 옷을 구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종잇조각 한 장이 이후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그 수표 때문에 두 사람이 잡혔으니까.



도망친 이병주와 이진구는 약이 떨어지거나 지갑이 비면 닥치는 대로 강도짓을 했다. 


서울의 한 웨딩샵에 침입해 혼자 있던 20대 여성을 묶어놓고 15만 원을 훔쳐 달아나고, 양천구나 강남구 등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의 병원에 들어가 의사를 협박하고 금품을 털었다.


그러다 이듬해 2월의 어느 추운 밤, 두 사람은 서울 신정네거리역 근처의 성형외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밤 11시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40대 남성 의사 한 명만 있었다. 그를 협박해서 100만 원권 수표를 7장 빼앗았다.


얼마 후 이진구가 동대문에서 쓴 바로 그 수표였다.



병원 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팀 형사들은 도난 등록이 된 수표가 동대문에서 사용됐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다행히 옷가게 상인은 100만 원권 수표를 내고 간 남자의 신분증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었다. 


이름은 이진구, 주민번호는 461105 -... 형사들은 즉시 주민등록 및 범죄기록을 확인했다. 사진을 확보해서 강도당한 의사들한테 보여주니 이 사람이 맞다고 했다. 


그렇게 이진구와 아직은 신원미상인 공범 1인에 대한 추적이 시작됐다.


결정적인 힌트


당시 강남서 형사들은 그즈음 일어난 절도 사건들이 전부 두 사람의 소행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석촌동이나 방이동 살인사건과 두 사람의 연관 가능성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강도범죄였음에도 그저 열심히 수사를 한 것이다.


수표를 쓴 이진구와 그의 동행이 주로 출몰했다는 방이동 일대를 조사해 보니 약간의 단서가 나왔다. 이진구의 고향이 전북 익산이고, 그쪽에 산다는 사촌동생 황씨의 신원을 파악했다.


강력팀 형사들은 바로 익산까지 황씨를 찾아갔다. 


안타깝게도 황씨는 이진구와 연락 안한지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아는 후배가 필로폰을 파는데 이진구가 그에게 약을 사려고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는 정보였다.



형사들은 황씨 후배의 통신내역을 이용해 최근 이진구가 전화를 걸어온 대구 감영공원 앞의 한 공중전화 위치를 파악했다. 한 다리 건너 한 다리, 코앞을 알 수 없는 수사가 이어졌다. 이번엔 대구로 가야했다. 


그곳에서 잠복하기를 몇일... 


드디어 이진구가 나타났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 한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긴 숨바꼭질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형사들은 재빨리 이진구에게 달려들어 제압하고 수갑을 채웠다. 


2005년 3월 15일, 그렇게 추적은 종지부를 찍었다.


잡힌 이진구를 추궁해 공범 이병주가 곧잘 출입한다는 대전의 게임장과 사우나에 대해 자백을 받았다. 즉시 대전으로 이동한 강력팀 형사들은, 하루 뒤인 3월 16일 대전시 동구의 한 지하상가에서 이병주를 검거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이씨들은 병원에 들어가 현금이나 수표를 털어온 잡범 취급을 받았다. 아무도 그들의 끔찍한 비밀을 알지 못했다.


망자들의 외침이었을까. 숨겨진 살인 행각은 어떻게 드러났을까?




<③ 마약범의 작업>에서 계속됩니다.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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