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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바다 Aug 25. 2018

인랑 | 좌절, 복잡, 엉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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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 저를 감동시킨 것들을 기록합니다만. 가끔은 인간이 이런 걸 만들어내기도 하는구나? 싶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해볼까 합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한심한) 것, 이랄까요?




인랑. 2018년 상반기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이 영화는 왜 폭망 했을까.


게다가 감독은 <장화 홍련>, <밀정> 등 크게 히트한 명작을 여러 편 연출한 김지운 이다. 강동원과 한효주, 정우성이라는 주연배우 라인업에 이르기까지 사실 이 영화는 망할 가능성보다 잘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직업상 망한 것이라도 왜 망했는지를 공들여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돌이켜보면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아래는 긴 글이 이어질 건데, 김지운 감독한테 애정이 있는 상태에서 기대감을 품고 <인랑>을 봤다가 실망하고 나온 분들은 한번 읽어보고 생각을 나눠봤음 좋겠다.  


김지운 감독 ©시사저널



좌절


무엇보다 첫째는, 관객의 기대를 좌절시켰다.


올초 또 하나의 비슷한 망작 <염력>과 비슷한 맥락이다. <염력>역시 <부산행>과 다수의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스토리텔링 및 연출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은 연상호의 신작이었다. 망할 가능성이 점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누리꾼들로부터 혹평을 들으며 망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두 영화 다 홍보 포인트가 SF적인 스펙터클이었다. 두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염력>에는 류승룡이 공중에 떠 있고, <인랑>에는 강동원이 <매드 맥스>를 연상시키는 매카닉 장비를 장착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매카닉 디스토피아가 그려진다. 둘 다 상당한 새로운 볼거리와 스펙터클을 보여주리라는 기대감을 준다.  



하지만 실제로 까보면 <염력>은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에 가깝고 가끔 나오는 염력 사용 장면들도 소소한 느낌이다. <인랑> 역시 마찬가지다. <블레이드 러너>느낌의 미래 황색 도시에서 쿵쿵대며 도시를 배회하는 매카닉들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조잡한 남산타워의 전망대에서 벌어지는 90년대 느낌의 액션씬을 봐야 했다. 그마저 좀 지루하다.  


<인랑>은 특히, 김지운이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메이킹 퀄리티가 좀 조악하다. 물이 첨벙 대는 지하도를 선택한 것은 세트 제작비용을 줄이고 음울한 근미래 디스토피아 느낌을 쉽게 낼 수 있는 선택이니 이해하더라도, 남산타워 액션씬처럼 중요한 부분에서는 좀 세련된 느낌이 드는 메이킹을 했어야 한다.  


대부분의 전투씬이 펼쳐지는 지하 수로
결정적 충돌이 일어나는 남산 타워. 90년대 중국영화 혹은 <쉬리>를 연상시키는 느낌


관객의 눈은 동시대에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블레이드 러너 2049>같은 압도적 이미지에 길들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을 만한 남산타워 액션씬은 90년대 <쉬리>를 보는 듯한, 참으로 당황스러운 퀄리티였다.  


결국 두 시간 동안 현실의 시름은 싹 잊고 에너제틱하게 즐겨볼 요량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조악한 퀄리티와 무거운 기계 갑옷들의 둔중한 움직임들만 지루하게 지켜보다가 나와야 한다. 이러면 욕을 먹는다. 미래-SF 톤이 아니라 적당한 액션 영화에 갑옷만 입혔다고 애당초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를 주지 말았어야 한다. (물론 마케팅 파트는 그리할 수 없었을 것이니 책임은 이야기를 만든 사람한테 물어야 한다.)  



복잡


두 번째는 문제는, 배경이 낯설고 복잡하다는 데 있다.


<신과 함께> 같은 초히트작의 경우 사실 할리우드에서 수백억 들인 SF 영화에 비하자면 퀄리티는 조악하다. 2000년대 초반쯤에 텍스처 얼기설기 붙어있고 폴리곤 어긋나던 3D 게임을 보는 기분도 종종 들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불과 두 달여 전에 본 나로서는 <신과 함께> 두 편을 보고 눈을 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관객은 즐거워하며 이 영화를 본다. 왜? 공감을 충분히 이끌어내는 인물들과 지옥과 현실을 오가는 신기방기한 상황 설정이 우리의 주의력을 빨아들여서 다른 결함들은 중요치 않은 걸로 치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은 종종 부족한 부분도 좋게 믿어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경험이 좀 더 완전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무장단체 '섹트'를 진압하는 특기대원들


하지만 <인랑>의 인물은 허술하고 배경은 복잡하다. 이 영화에서 인물이 노닐고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은 근미래에 통일에 반대하는 '섹트'라는 무장단체와 그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특기대가 대립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공안부가 특기대와 권력 대결을 하며 복잡한 함수를 만들어낸다.  


대중 영화에서 배경은 단순해야 한다. 천국-지옥-현실처럼 따로 이해하기 위해 많이 애쓸 필요가 없어야 한다. <강철비>처럼 근미래에 아직 일어난 적 없는 대립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상황이어서 특별히 많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배경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랑>의 배경은 지금 관객들이 머릿속에 분류하고 저장해둔 현실과 아무 연관이 없어서 어렵다. 집중해서 보고 있어도 자꾸 '이게 뭐지?' 싶은 구도들이 까딱거리며 몰입을 방해한다.


물론 자기들끼리 수 차례 중지를 모아 각본을 쓴 제작진 입장에서는 나름 개연성 있게 상황을 붙여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몇 분 안에 빠르게 영화의 배경을 흡수하고 인물과 사건을 지켜봐야 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현실과 연결 지어 직관적으로 흡수할 수 없는 배경은 부담스럽다.


경제 위기와 반통일 흐름이라는 설정까지는 수용 가능하지만, 특기대를 보면서는 현실의 누구를 떠올려 자신들의 분노를 투사해야 하는지, 공안부를 보면서는 현실의 어떤 권력을 떠올려 감정 이입해야 하는지가 애매하다. 이런 투사와 감정이입 작업들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어떤 스토리에 몰입할 때 중요한 고리가 된다. 하지만 <인랑>의 배경들은 현실에서 우리가 분노하고 애정 하는 각종 사회 요소들과 너무 거리가 멀고 낯설어서 이입이 버겁다.


일본 애니메이션 인랑


왜 그랬을까. 김지운 감독은 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국내 상황에 맞게 각색해 스토리를 만들었다. 감독 입장에서는 인랑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든 써야겠는데 원작에는 배경이 다르다. 그러니 갈등 구도는 유지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게 이것저것 꾸며 넣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현실과 다른 상상 요소들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것 같다.


특급 엉뚱함


세 번째, 인물의 감정선이 엉뚱하다.


인물이 허술하게 구축되었다는 것은 주인공들의 욕망이 선뜻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스토리는 망가진 현실에 처한 주인공한테서 시작한다. 많은 것을 잃은 인물이 다시 원하고 이루려는 무언가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몰입을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고된 현실 때문에 포기한 꿈을 다시 이루려는 핸드볼 선수들의 눈물겨운 노력(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나 딸을 납치해간 악당들을 정의롭고 강력한 개인이 제 손으로 처치하며 구해내는 과정(테이큰)처럼 단순하고 강렬하게 주인공의 욕망은 설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랑>에서 강동원은 무엇 사이에서 갈등하고 한효주는 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지, 그들의 욕망이 어딜 향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좋은 배우 한효주는 멋진 배우 강동원과 두 번의 망작을 함께했다. 이제 그만...


마지막 한 줄 정도는 훈훈한 덕담을 남겨야 하겠는데 딱히 <인랑>에 대해서는 그럴 부분이 없다. 십수 년 전 <장화 홍련>을 보고 호러 영화의 신세계라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밀정>의 세밀한 인물 묘사와 시대 재현도 대단했다. 분명 그는 뼛속 깊이 멋진 크리에이터다. 김지운 감독이 차기작에서는 부디 또 한 번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들고 오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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