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나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원 Apr 29. 2019

캡틴 마블 | 문화가 뼈를 만든다

보고 나서 쓰다.

* 스포주의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 캡틴 마블. 생각했던 것보다 정교한 페미니즘 영화였다.


특히 마지막 장면, KO패 위기에 처한 욘로그 사령관이 캐럴 댄버스에게 절규하듯 말한다.


욘로그 : 네가 네 힘 만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해봐!

댄버스 : (포톤 블러스트 발사하며) 퐈파파파파~~~  ....... "나는 너 따위한테 증명할 거 없어 시밸럼아"



이렇게(까지는 안 했지만 암튼) 일갈하는 장면은, 눈물 찔끔 날만큼 통쾌했다. 온갖 유무형의 권력을 휘두르며 여성들을 품평하고 박싱(boxing)해 온 남성들에게 멕이는 강력한 한방. 캐럴이 모든 여성들을 대변해


"나한테 순응적이고 성애적인 모습을 바라겠지만 난 네가 바라는 대로 나를 증명할 필요 없어!! 난 나 자신 그대로도 존엄해!"


라고 외치는 듯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장면이 이런 식이면 이 영화의 제작 의도는 명확하다. (MCU 시리즈 메인 빌런치곤 약하다는 평을 듣는) 욘로그 사령관은 이런 페미니즘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일부러 캐럴이 후~ 하고 날려버릴 수 있는 작은 휴지조각처럼 소비된 느낌까지 들었다.


만약 어떤 페미니스트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고, 여성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총정리스러운 글을 쓴다면 무슨 내용이 될까? (1) 어릴 때부터 ‘너는 약해’, '너는 조신해야 하고 알아서 조심해야 해’, ‘남자애들이 좀 짓궂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참아’ 하는 사회적 박싱을 인식하고 (2) 그 유리상자를 만들어 여성을 가둬온 권력을 짓부수기 위한 사상적 각성(페미니즘)을 한 뒤에 (3) 비슷한 차별을 받아온 다양한 약자들과 연대해 차별 구조를 깨는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요컨대 "문화가 뼈를 만든다"는 말을 깊이 이해하고 당신의 뼈가 원래 그렇게 작고 왜소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문화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약자들과 연대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가 뼈를 만든다


<캡틴 마블>의 이야기를 짠 사람들이 아마 이런 총정리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 캐럴은 어떤 남자아이보다 당차고 씩씩한 아이였지만, 어릴 때 야구를 할 때든 어른이 되어 군에 입대했을 때든 ‘너는 여자라 안된다’는 조롱을 남자들한테 들어야 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지지 않고 열심히 군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세상을 구하러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네 몸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 말하는 남성이 캐럴의 기억을 지우고 정신적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 대목을 보면서는, 여성들에게 물뽕을 먹여 기억을 잃게 한 뒤에 성폭행한 최근의 범죄자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숱한 고난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우주 난민 +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며 자신이 어떤 ‘뼈’를 가진 여자였는지 완전히 깨닫는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깨닫고 지배자를 해체해버린다.


<룸(2015)>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페미니스트 배우 브리 라슨



물론 이 모든 서사는 세상에서 영화 장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멋진 상품일 수 있다. 2016년 전후로 전 세계에서 #Metoo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조직되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까?


하지만 <캡틴 마블>의 탄생이 콘텐츠 장사꾼들의 면밀한 전략이어도 좋다. 장사 한번 기깔나게 해 보자는 욕심쟁이 구렁이가 뱃속에 들어앉아있든 뭐든 간에, 어쨌든 <캡틴 마블>은 전 세계 흥행 10억 달러를 돌파한 2019년 첫 번째 영화이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감응한 첫 번째 여성 임파워 영화인 것이다. 또한 난민의 입장에 한 번쯤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반-난민혐오 영화이기도 하다.


스포라 말은 못 하겠지만, <어벤저스 엔드게임(2019)>에서 캡틴 마블은 다시 한번 활약한다.


평소에 남자가 여자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난민 뉴스에 악플 달던 사람들도 극장에 앉으면 MCU 영화에 열광할 것이다. 동시대에 어떤 창작자들은 이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게 난민 혐오에 저항하고 대중이 가진 성별 편견과 자연스레 대화한다. 사람들의 평화적 공존과 다양성에 기여하는 수많은 '옳음'이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폭발적 동력에 실려 사람들의 가슴에 담기고 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인랑 | 좌절, 복잡, 엉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